비평/게임

    사쿠라의 각 - 벚꽃의 시간은 시가 된다.

    사쿠라의 각 -벚나무 숲 아래를 거닐다- (サクラノ刻 -櫻の森の下を歩む-) 5.6 나의 언어의 한계는 나의 세계를 뜻한다. 7.0 말할 수 없는 것에는 침묵해야 한다. -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 저 모든 이야기는 바로 이 지점에서 출발하였다. 시나리오 라이터 스카지(SCA-自)의 처녀작 . 그리고 그것의 셀프 리메이크에 가까운 과 주제 의식을 계승한 . 그리고 그 작품에 일종의 마침표를 찍은 본 작품 까지. 하나의 주제 의식에서 출발한 이 작품들은 작품을 거듭하며 사유를 확장하고 그 끝의 작품인 에서는 지난 작품들의 주제를 아울러 그 주제에 대한 스스로의 답을 내놓았다. 이라는 작품은 '언어의 한계는 세계의 한계', '말할 수 없는 것에는 침묵해야 한다'는 명제를 통해 지난 글#1#2에서 사용했던 표현을 ..

    사쿠라의 시 - 인과 교류의 예술

    사쿠라의 시 -벚나무 숲 위를 흩날리다- (サクラノ詩 -櫻の森の上を舞う-) 그것이 허무하다면 허무 자체가 그러하니 어느 정도는 모두에게 공통될 것입니다. (모든 것이 내 안의 모두이듯이, 모두가 각자 속의 전부니까요.) 작품은 미야자와 겐지의 의 3연 마지막 문단을 인용하며 시작한다. 작품의 첫머리는 굉장히 중요하다. 작품의 전체적인 이미지를 결정짓기 때문이다. 작품은 왜 이 문장을 인용하면서 시작한 것일까? 이 작품은 전작 의 테마였던 '멋진 나날들'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지난 글에서 표현을 빌려 오자면, 멋진 나날들이란 자신의 의지로 운명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닌, 삶의 주인이 자신임을 천명하는 삶이다. 전작품은 그곳에 이르는 과정을 그려내는 작품이었지만, 이번에는 그 멋진 나날들 안에서 '말할 수 ..

    화이트 앨범 2 - 다시 그 계절이 온다

    화이트 앨범 2(WHITE ALBUM2) 다시 그 계절이 온다. 화이트 앨범의 계절이 온다. 에로게 역사에 기록된 공전절후의 명작, 화이트 앨범 2를 다시 플레이했다. 아마 이걸로 5회 정도 플레이 했는데, 이미 내 안에서는 겨울의 대명사와 같은 것이라 12월 말쯤부터는 이 작품이 공연히 떠오르곤 한다. 그 정도로 겨울을 테마로 잘 살린 작품이다. 게다가 유명하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나리오 라이터 중 하나인 마루토 후미아키의 마지막 게임 시나리오였다. 스스로도 라이터 인생의 20%를 담은 작품이라고 말한 만큼, 여전히 마루토 작품 중에서 가장 훌륭한 시나리오를 자랑하고 있다. 전작인 화이트 앨범도 에로게 역사에 남은 작품인 만큼 후속작은 시나리오 라이터의 네임벨류와 함께 발매되기도 전부터 이리저리 기대..

    분명, 흐림없이 맑은 아침색보다도 - 다정함의 이야기

    분명, 흐림없이 맑은 아침색보다도 (きっと、澄みわたる朝色よりも、) 이제 와서 이런 말하긴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어릴 적부터 나는 멋진 세계를 동경하는 아이였다. 아주 어릴 적부터 TV나 밖에 나가 노는 것보다 책을 읽던 아이였고, 그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것은 동화나 따스한 이야기였다. 그게 어찌하다 서브컬처로까지 옮겨붙게 되었고 지금의 내가 된 것이다. 이 모든 과정 속에서 내가 동경했던 것은 하나뿐이었다. 바로 다정한 세계다. 빈말로도 내가 살아온 세상은 아름답다고만 할 수는 없는 세계였고, 그건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다. 내가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이야기 속의 세계는 언제나 동경의 대상이자 나의 꿈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슈몬 유우라는 시나리오 라이터를 좋아하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은 자명 한 ..

    사랑x친애 그녀 - 작가의 폭주가 낳은 비극

    사랑x친애 그녀 (恋×シンアイ彼女) 거두절미하고 본편만 놓고 보자면 이 작품은 별로였다. 그림과 음악은 물론 말할 필요가 없이 최고였지만, 정작 시나리오가 문제였다. 유이와 린카루트는 지루하기 짝이 없었고, 개연성은 심각할 정도로 나빴다. 아야네는 캐릭터가 워낙 좋아서 즐겁게 하긴 했는데, 시나리오만 놓고 보면 사실 매우 단순한 이야기였다. 거기다 극 중 클라이맥스인 아야네가 노래 부르러 올라가는 장면은 이해를 포기할 정도로 막 나가는 장면이었다. 그냥 전반적으로 캐릭터가 만들어가는 이야기가 아니라, 이야기에 끼워 맞춰 캐릭터가 움직이는 인형극의 느낌이었다. 이야기로써는 도저히 좋게 평가해줄 수가 없는 그런 이야기. 다만 에필로그에선 상황이 달라진다. 그전까지가 쥐어 짜낸 이야기라면, 여기서부터는 폭주해..

    니어 오토마타 - 이해와 존재의의 그 너머

    니어 오토마타 (Nier:Automata) 와 이전작 의 스포일러를 포함되어 있습니다. 니어 오토마타라는 게임에 대해서 내가 받은 느낌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아름다움이었다. 이 작품은 굉장히 아름답다. 그건 단순히 이 작품을 이루고 있는 '세계'라던가, 그 세계를 표현하는 그래픽이라던가, 음악, 캐릭터 등의 부분에 대해서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 모든 것을 아울러 니어 오토마타라는 게임 그 자체가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이 작품은 정말 절묘한 밸런스 위에서 성립하고 있는 작품이다. 플레이어 경험, 그래픽, 디자인, 음악, 이야기까지 모든 부분에서 서로가 서로의 상승 작용을 이끌어내는 시너지 효과를 발휘하게끔 설계되어 있고, 정말 눈에 띄는 커다란 부분부터 눈치채지 못하고 지나가기 쉬운 아주 작은 부분까지..

    백일몽의 청사진 - 세계라고 불린 소녀

    백일몽의 청사진 THE GIRL WHO'S CALLED THE WORLD (白昼夢の青写真, 2020) 사람을 결정하는 것은 사람이다. 개성이라고 하는 것의 정체는 우리들 하나 하나가 오늘날까지 살아온 기억의 집합에 지나지 않는다. 무언가의 판단을 내릴 때, 사람은 과거의 경험을 근거로 한다. 그리고 몇 가지의 판단의 나열이 행동을 만들어 낸다. 그러니── 과거의 경험, 기억이 우리의 행동을 지배한다. 우리는 상대의 행동을 보는 것으로 그 사람의 개성을 판단한다. 즉, 우리는 간접적으로 상대의 개성의 집합을 개성이라고 인식하고 있다. 그 인식의 연쇄가 이 세계를 구성하고 있다. 나로부터 보이는 세계의 모습, 당신들로부터 보이는 세계의 모습. 개개인을 잇는 공통 인식의 집합이 세계를 형성하고 있다. 푸르고 ..

    멋진 나날들 ~불연속 존재~ - 말할 수 없는 것 그 너머

    멋진 나날들 ~불연속 존재~ HD (素晴らしき日々 ~不連続存在~ HD, 2017) Tell them I've had a wonderful life 멋진 삶을 살았노라고 사람들에게 이야기해 주시오.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 평생을 자살 충동 속에서 살아왔던 대철학자의 유언이다. 그는 무슨 심정으로 이러한 유언을 남겼던 것일까? ​ 이 작품은 바로 이 대철학자,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의 유언과 저작 에서 출발한다. 시나리오 라이터 SCA-自(이하 스카지)가 를 읽고 생각한 감상 그 자체를 새로운 작품으로 만들어낸 것이다. 그것도 두 번을. 첫번째는 , 그리고 두번째가 바로 본 작 이다. 감상문을 두 번 작성한데는 의미가 있다. 은 앞서 제작된 작품 과 결별하기 위해 제작된 작품이다. 그렇기 때문에 본 작에 대해 ..

    히마와리 -Pebble in the sky- - 이야기의 힘

    히마와리 -Pebble in the sky- (ひまわり -Pebble in the sky-) 내가 좋아하는 시나리오 라이터 '고-'의 대표작, 히마와리. 사실 이 작품을 이번에 처음 플레이하는 건 아니고, 원작인 동인 게임 쪽을 플레이했었다. 그게 벌써 플레이한지 5년은 족히 넘었던지라 아일랜드 발매 기념에 DLSite에서 할인하고 있길래 덥석 구입하고 플레이. 해보니 잊어버린 부분도 상당히 있었던 지라 다시 플레이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만족도는 꽤 높았다. 특히, 기존 동인판은 보이스가 없어서 단조롭게 느껴지는 부분이 있는데 PSP판, Vita판을 거치며 보이스가 추가되었던 부분은 매우 만족스러웠다. 또한 고오의 단편 소설─코모레비, 카게로우─를 수록하고 있다는 점도 매우 만족스러웠던 포인트. 작화의 ..

    아일랜드 (ISLAND) - 아쉽기도 하지만 즐거운 이야기

    아일랜드 (ISLAND) 좋아하는 시나리오 라이터 고-의 신작 . 발매 전부터 왕창 기대하고 있었다. 이거 하나 하려고 를 다시 플레이하고, 를 읽었다. 사실 , 와 달리 얘는 완전히 따로 노는 느낌이 더 강했다. 뭐 그래도 결과는 나름대로 대만족. 사실 후반부에 너무 어이가 없어서 한 번은 정말 화가 났었는데, 그래도 히든 엔딩이 살렸다. 지금도 그 부분만큼은 정말 마음에 안 듦. 아 물론, 그 이외에도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은 꽤 있지만 그래도 좋은 점이 더 많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개인적인 평가로는 대만족으로. 다루는 소재는 '시간'이다. 특히 '시간 여행'과 '시간의 상대성'을 중심으로. 시간이란 소재는 그 특성상 매혹적일 수밖에 없는 소재다. 특히나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시간은 한 방향이지만, ..

    아마츠츠미 - 신을 통한 '인간 다움'

    아마츠츠미 (アマツツミ) 인간은 본디 선한 존재인가, 악한 존재인가? 서브컬처의 많은 작품들은 캐릭터를 조형할 때 '처음부터 선한 존재'와 '처음부터 악한 존재'로 나누어서 캐릭터를 형성하는 경향이 강하다. 물론, 악역들이 '사실은 이러이러한 이유로 나쁜 짓을 했다'라는 것을 이야기하여 악당 캐릭터들에게 일종의 면죄부를 부여하는 작품들도 많지만 본질적인 의미에서 인간의 선과 악을 동시에 다루는 작품은 서브컬처에선 생각보다 드문 편이다. 인간이 선한 존재이냐 악한 존재이냐를 정확히 정의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지만, 우리는 살아가면서 인간이 그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은 선과 악을 동시에 혼재한 존재임을 어렴풋이 깨닫는다. 이 세상엔 완전히 선하기만 한 존재는 없고, 완전히 악하기만 한 존재는 없다. 그..

    풍경의 바다의 아페이리아 - SF 에로게의 새로운 역작

    풍경의 바다의 아페이리아 (景の海のアペイリア) 나는 과학을 참 좋아한다. 전공도, 목표로 하는 직업도 과학에 관련된 직업이고, 서브컬처를 제외한다면 내가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분야도 과학이다. 그렇기 때문에 과학을 소재로 한 서브컬처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과 두 번째로 좋아하는 것을 융합한, 나의 궁극의 취향이라고 할 수 있는 그런 존재다. 그러나 동시에 안타깝게도 이런 과학을 소재로 하는 서브컬처의 수는 많지 않다. 거기에서 옥석을 가리려고 한다면 '옥'이 될만한 작품은 더더욱 없다. 아무래도 매력적인 소재이긴 하나, 제대로 살려내기 힘든 소재인데다 작가의 사전 조사가 굉장히 중요한 소재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소재를 잘 살리더라도 정작 본론인 '이야기'가 재미없다면 의미가 없어진다. 결국 좋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