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마와리 -Pebble in the sky- (ひまわり -Pebble in the sky-)
내가 좋아하는 시나리오 라이터 '고-'의 대표작, 히마와리. 사실 이 작품을 이번에 처음 플레이하는 건 아니고, 원작인 동인 게임 쪽을 플레이했었다. 그게 벌써 플레이한지 5년은 족히 넘었던지라 아일랜드 발매 기념에 DLSite에서 할인하고 있길래 덥석 구입하고 플레이. 해보니 잊어버린 부분도 상당히 있었던 지라 다시 플레이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만족도는 꽤 높았다. 특히, 기존 동인판은 보이스가 없어서 단조롭게 느껴지는 부분이 있는데 PSP판, Vita판을 거치며 보이스가 추가되었던 부분은 매우 만족스러웠다. 또한 고오의 단편 소설─코모레비, 카게로우─를 수록하고 있다는 점도 매우 만족스러웠던 포인트. 작화의 경우 새로 그리긴 했는데, 개인적으론 동인판 쪽의 작화가 조금 더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이쪽도 싫은 건 아니라 뭐...
사실 동인게임이라고 한다면 퀄리티 면에서 상업 게임에 비해 부족하다는 인상이 있는 편이지만, 히마와리는 동인 원판 쪽도 웬만한 상업 게임 뺨을 때릴 수 있을 정도로 퀄리티가 출중했다. 거기에 컨슈머 화하면서 날개를 달아준 격. 원판부터 볼륨이 상업게임 수준이었고, 이야기의 퀄리티는 말할 필요가 없었다.
리메이크에 관한 이야기는 접어두고, 작품에 대해서 이야기하자면 먼저 히마와리는 에로게로써는 상당히 드문편인 SF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작품이다. SF라고 하더라도 로봇과 우주 전함이 날아다니고 빔과 광선검이 활약하는 그런 세계가 아닌, 인류가 막 우주를 향해 발을 내딛고 있는 근미래를 배경으로 한다. 그렇다 보니 실제로 작품의 주요한 배경은 우주가 아닌 지구 위다. 인구는 100억 이상, 자원은 고갈해가는 지구. 그곳에서 우주를 동경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기억을 잃은 주인공 요이치와, 요이치가 몸담고 있는 우주부의 부장 긴가. 그리고 요이치의 친구인 아스카, 셋의 생활 속에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미확인 비행 물체와 함께 여자아이, 아리에스가 떨어진다. 떨어지면서 충격으로 기억을 잃은 아리에스와 동거하면서 발생하는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 바로 <히마와리>다. 블랭크 노트 측 공식 장르 명도 로리 우주인 동거 ADV.
아리에스와의 이야기를 다룬 1장도 나쁘지는 않지만, 사실 이 작품의 진가는 2장에 해당하는 부분인 아쿠아 편(과거 편)과 그 이후에 있다. 현재(2050년)와 과거(2048년)을 오가는 이야기 구조로, 1장이 캐릭터 소개와 배경 설명을 하는 역할이었다면 본격적인 이야기는 바로 2장 이후부터 시작된다. '인류를 구하기 위한 실험'과, 그 과정 속에서 상처받고 망가져가는 사람과, 구원의 이야기.
이 작품의 강점은 바로 이것이다. 이야기와 구성. 특히 구성면에서 칭찬해주고 싶은 것이, 이 작품은 상당히 긴 플레이 타임 동안 끊임없이 주어지는 복선 거의 대부분을 회수한다. 그것도 놀라운 방법으로. 이야기가 진행되면 진행될수록 서서히 진실이 밝혀지는 것에서 오는 쾌감 역시 만족스러운 부분. 또한 용기사07(개인적으론 싫어한다)의 영향을 좀 받았던 만큼 작품 곳곳에 들어가 있는 반전을 사용하는 테크닉도 수준급. 임팩트를 위한 반전이 아니라, 극을 이끌어 가기 위한 반전을 구사하는 시나리오 라이터다.
이야기 부문에서도 세계관을 굉장히 잘 짜올렸고, 거기에 인물들 간의 갈등과 상처를 굉장히 섬세하게 표현해냈다는 점에서 만족스러웠다. 특히 이야기의 테마가 만족스러웠는데, 다루고 있는 테마는 우주에 대한 동경, 꿈과 현실, 인간관계 뭐 다양하겠지만 이 작품의 본질을 가장 찌르는 테마는 역시 아이와 어른일 것이다. 이는 어른조─다이고, 아키라, 아카리─의 이야기와 요이치와 아스카, 아쿠아의 이야기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이 작품에서 나오는 어른들은 하나같이 비뚤어지게 성장했다. 몸과 지식은 어른이 되어가지만, 마음은 여전히 소년 소녀로 남아있는 어른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사실 이런 설정은 많은 작품에선 이상적인 형태로 표현하지만, 이 작품은 거기서 비롯되는 괴리감이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 보여준다. '아직 어른이지 않았던 시절에 사로잡혀 조금도 앞으로 나아가고 있지 못하는 어른들'이라는 형태로.
외롭기 때문에, 상처입힌다. 매우 어리석은 행위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외로움을 혼자서 안고 살 수는 없다.
아쿠아도, 나도 그런 인간이다.
아니, 우리 뿐만이 아니다.
반드시 사람은, 모두 다 안지 못할 마음을 안고 살고 있다.
쭉, 상처입히기 위한 누군가를 찾고 있다.
─상처입혀도 용서받는, 상대를 요구하고 있다.
그런 어른들의 곁에서 성장한 아이들─아리에스와 아쿠아─역시 마찬가지다. 그런 어른들 속에서 어린아이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었던 아리에스와, 강제로 어른이 되어야만 했던 아쿠아. 방향성은 조금 다르지만, 어른조와 같은 전철을 밟을 수밖에 없었던 아스카 역시 마찬가지다. 이런 아이들이 똑바로 자신의 미래와 마주하고, 어른으로 한 걸음씩 나아가는 모습과 구원하고, 구원받는 이야기야말로 이 작품의 테마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이야기에서 오는 캐릭터 역시 훌륭하다. 특히 단 하나를 꼽자면 아쿠아. 수많은 아쿠아 신도가 그를 증명하듯, 상처받은 소녀와 거기에서 오는 불안정함, 비틀림을 정말 잘 표현한 캐릭터가 아닌가 싶다. 특히,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어른'이 되어야만 했던 '소녀' 사이의 괴리를 잘 표현해냈다는 점이 마음에 쏙 들었다. 가장 마음에 드는 신은 역시 문짝 너머로 등을 맞대며 요이치와 아쿠아가 대화하던 그 신. 과거 편 마지막 신과 더불어 이 작품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장면이었다. 두 장면 모두 아쿠아가 있었다는 점을 떠올려보면 역시 아쿠아란 존재는 이 작품에서 너무나도 크단 생각이 든다.
요이치의 설정 역시 빼놓을 수 없는데, 주인공이 '기억 상실'이란 설정은 생각보다 드문 편이다. 그리고 이 설정을 어떻게 활용하느냐면, 플레이어의 시점에 적극 활용한다. 주인공이 아무런 배경지식이 없기 때문에, 플레이어 역시 주인공으로부터 그 어떠한 정보를 얻을 수 없다. 플레이어는 주어진 장면들에서 정보를 이끌어내고 이를 조합해서 이야기를 짜 맞춰야 한다. 이런 부분도 소소하지만 꽤 마음에 들었다.
요즘 주류를 이루는 캐릭터 게임과는 달리, 이야기의 힘 하나만으로 플레이어를 압도하는 타입의 작품으로 동인게임 출신이지만 웬만한 상업게임 이상으로 출중한 퀄리티를 지닌 작품이다. 이런 작품이 단지 동인 게임이라는 이유만으로 묻혀있는 것은 좀 슬픈 사실이다. 고-의 신작이자, 첫 상업게임, 그리고 히마와리 세계관의 연장선상을 다루고 있는 아일랜드(ISLAND)의 발매로 히마와리를 찾는 유저가 늘고 있는데, 더 많은 플레이어가 히마와리를 플레이했으면 좋겠다.
나는 지금부터 인생의 순간 순간 마다 여러가지 선택을 하게 될 것이다.
그렇지만 그 선택에, 정답도 실수도 없다.
중요한 것은,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다.
두려워해, 자신의 세계에 갇히는 것이 무엇이야말로 어리석은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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