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일랜드 (ISLAND)
좋아하는 시나리오 라이터 고-의 신작 <아일랜드>. 발매 전부터 왕창 기대하고 있었다. 이거 하나 하려고 <히마와리>를 다시 플레이하고, <사일런트 월드>를 읽었다. 사실 <히마와리>, <사일런트 월드>와 달리 얘는 완전히 따로 노는 느낌이 더 강했다. 뭐 그래도 결과는 나름대로 대만족. 사실 후반부에 너무 어이가 없어서 한 번은 정말 화가 났었는데, 그래도 히든 엔딩이 살렸다. 지금도 그 부분만큼은 정말 마음에 안 듦. 아 물론, 그 이외에도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은 꽤 있지만 그래도 좋은 점이 더 많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개인적인 평가로는 대만족으로.
다루는 소재는 '시간'이다. 특히 '시간 여행'과 '시간의 상대성'을 중심으로. 시간이란 소재는 그 특성상 매혹적일 수밖에 없는 소재다. 특히나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시간은 한 방향이지만, 이런 시간을 소재로 하는 작품은 시간의 방향이 두 방향인데다 병렬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반전을 사용하기가 용이하다. 그래서 흔히 명작, 혹은 재미있는 작품이라고 불리는 작품 상당수가 이런 '시간'을 잘 활용하는 경우가 많다. 반면, 이걸 제대로 다루지 못한다면 철저하게 묻히는 작품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아일랜드는 이 시간을 꽤 잘 다루었다고 생각한다. 이런 시간을 소재로 한 작품을 좋아한다면 아일랜드도 충분히 즐겁게 즐길 수 있을 것이다.
작품 자체에 관한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고-의 첫 상업작이기도 한 만큼 기존과 작풍은 조금 바뀌었다. '쓰고 싶은 이야기'와 '팔릴 만한 이야기' 사이에서 절묘하게 줄타기 했다고 해야 하나. 그래도 이 정도면 양쪽 다 어느 정도 만족시킨 이야기가 아니었을까 싶다. 다만 그 결과인지, 아니면 처음부터 의식을 거의 하지 않았던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기존의 고-의 세계와는 꽤나 안 맞물리는 느낌. 특히나 아일랜드의 세계관대로라면 히마와리의 미래는 배드 엔딩에 한없이 가까워진다는 게 꽤 마음에 안 드는 부분 중 하나다.
기본적인 골자는 <히마와리>와도 비슷하다. A-B-A로 구성되는 무대(히마와리의 경우 미야우라-히마와리-미야우라) 설정으로 인해 플레이어의 기분을 전환시켜주는 것으로 몰입감을 상승시킨다는 점은 이전과도 동일했다. 개인적으로 아일랜드의 'B'도 매우 만족스러웠다. 임팩트가 엄청 크거나 하진 않지만, 린네가 너무 귀여웠기 때문에 플레이하는 내내 행복했을 정도.
하지만 결정적으로 달라진 부분이 있다. 바로 서브 캐릭터들의 이야기다. <히마와리>는 버리는 캐릭터가 없었다. 히로인인 아리에스, 아쿠아, 아스카는 물론이고 긴가, 아키라, 다이고, 아카리와 같은 서브 캐릭터들의 이야기마저도 제대로 다루었다. 등장하는 인물 하나하나에는 그들만의 이야기가 있고, 그들의 이야기가 맞물려 하나의 이야기를 자아내는 것이 <히마와리>였다. 반면 본작은 철저히 세츠나와 린네의 이야기다. 그 이외의 모든 캐릭터들은 사실 이 둘의 이야기가 이뤄지기 위한 '도구'였다. 그렇게 철저히 희생당한 것이 사라와 카렌이라는 두 히로인이다. 이 둘의 이야기는 본편의 메인스트림에서 한참 떨어져 있는데다, 그들 자체의 이야기도 매우 허술하게 다루어졌다. 정말 단순히 세계관을 소개하는 역할 정도.
내가 히마와리를 좋아했던 이유 중 하나는 이렇게 모든 캐릭터들에게 이야기가 있다는 점이었는데, 아일랜드는 철저하게 세츠나와 린네에 초점을 맞추었다. 이 부분이 가장 아쉽다. <사일런트 월드>때는 소설 한 권이라는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납득했지만, 아일랜드는 결코 플레이 타임이 짧지는 않다. 다루려면 충분히 다룰 수 있는 분량이었다고 생각한다.
다음으로 아쉬웠던 부분은 역시 이론 소개에 관한 부분. 너무 장황한데다, 오류가 군데군데 엿보인다. 물론 SF는 과학 그 자체가 아니기 때문에 오류가 있어도 픽션이라고 감안하고 넘어가면 된다지만, 실제 이론을 '잘못 끌어와서' 설명하고 있다는 점은 꽤 거슬렸다. 아일랜드의 장르가 뭐냐고 묻는다면 물론 SF라고 대답은 하겠지만, 그 SF는 과학의 영역보다는 오컬트의 영역에 훨씬 가깝지 않나 싶다.
또한 한 여름 편의 린네 엔드도 감점 포인트. 갈등 해결이 너무나도 허망하게 끝났고, 엔딩 자체도 굉장히 허무했다. 물론 뒤에 트루 엔드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이 루트를 거의 배드 엔딩 수준으로 생각하고 있을지는 몰라도, 유저에 따라 저게 '정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었을 가능성도 분명 존재한다. 난 그래서 이 루트를 나누는 분기점이야말로 이 작품의 핵심 그 자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시나리오 라이터 쪽에서 '이게 진짜 정답이야!'라고 말해버린다면, 사실 그 분기점이 존재할 이유가 5할은 사라진다고 생각한다.
처음 이 부분을 플레이했을 때는 이 작품이 완전히 미끄러진 줄 알았다. 분명 겨울 편에서 한여름 편까지 넘어오는 과정에선 정말 만족하면서 플레이하고 있었는데, 그때 느낀 좌절감이란. 이후 트루 엔드에서 다시 기분은 돌아왔지만 저 부분만큼은 정말 최악이었다. 이 작품 평가에서 가장 거슬렸던 부분이기도 하다. 아쉬운 점은 크게 이 정도였다. 자잘하게 아쉬운 부분도 있었지만, 그 부분은 크게 중요한 것은 아니니.
만족스러웠던 부분에 대해서 이야기하자면, 역시 이야기가 아닐까. 린네 루트까지만 해도 솔직히 좀 불안불안했는데, 결국 마지막까지 몰입하면서 플레이했던 이유는 이야기가 좋았기 때문이다. 특히 칭찬하고 싶은 부분은 완급조절. 플레이어를 들었다 놨다 하는 게 아주 기가 막혔다. 시리어스와 일상 파트를 적절히 분배해서 플레이어의 몰입감을 꾸준히 유지해주었다는 것이 너무 마음에 들었다.
또한 기억 상실이라는 주인공 설정을 제대로 살렸다는 점인데, 잘못된 정보와 옳은 정보를 적절히 섞어 플레이어에게 던지면서 '생각하게' 만드는 부분도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특히 트릭을 사용해서 플레이 타임 내내 플레이어에게 기분 좋은 뒤통수를 때린다는 점도 좋았다. 특히 훌륭한 부분은 역시 RE: 엔딩. 충격의 연속이었다. (다만 린네 루트 이전의 카렌 루트나 사라 루트에서는 정말 기분 나쁜 뒤통수였다.)
복선도 몇 가지를 제외한다면 거의 다 회수했다는 점도 인상적인 포인트. 물론 원초의 세츠나는 어떤 인물이었는가에 대해선 끝까지 밝히지 않았다는 부분은 아쉽지만. 엔딩 자체가 열린 결말이기 때문에 팬디스크로 풀어주면 좋겠다는 생각은 든다.
그리고 이번 작품에서 느낀 가장 새로운 감상은 성우의 중요성이 될 것이다. 개인적으론 성우는 그냥 캐릭터에 어울리기만 하면 된다는 입장이기 때문에 알고 있는 성우의 이름도 적은 편이지만, (열 손가락으로 꼽는다) 겨울 편을 진행하면서 성우 한 명이 작품을 이끌고 갈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겨울 편의 린네 보이스는 최고였다. 귀여워서 플레이하는 내내 몸을 배배 꼬면서 즐겼다. 성우의 중요성을 오타쿠짓 15년 만에 배웠다는 것도 참..
전반적으로 아쉬움이 없진 않지만, 그래도 정말 즐거웠던 작품이다. 특히 겨울 편의 린네가 너무나도 귀여웠기 때문에, 그 파트를 플레이하는 시간은 정말이지 행복한 시간이었다. 웬만한 캐릭터 게임의 메인 히로인 이상으로 귀여운 캐릭터였다. RE: 엔딩의 충격도 좋았고. 서브 캐릭터의 활용이 없었다는 점은 좀 많이 아쉽지만, 다음 작품에선 더 좋은 모습을 보여줄 거라고 기대한다. 고-의 다음 작품이 너무나도 기대된다.
여줄 거라고 기대한다. 고-의 다음 작품이 너무나도 기대된다.
사람은 누구나 가면을 쓰고 살아간다.
가면을 쓰는 것으로 다른 사람과 나란히 설 수 있다.
자유를 요구하며 가면을 벗어 던진다 한들, 거기에 진정한 자신은 없다.
진정한 자신이란, 다른 사람과의 연결 속에서 밖에 찾아낼 수 없다.
"자유롭다는 것은, 언제 어디서나 내가 원하는 가면을 쓰는 것이야.
되고 싶은 자신이 되려고 노력하는 것이야."
사실 내가 원하는 엔딩은 이런 모양이 아니었다. 그랬기 때문에 '린네(凛音) 엔딩' 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 작품에 있어서 가장 핵심적인 부분은 바로 린네(凛音)와 린네(リンネ)의 구분이라고 생각한다. 무한히 반복되는 시간 속에서, 누가 원초의 '린네'였는지는 구분할 수 없다. 그야말로 작가가 정답을 내리지 않는다면. 그렇다면 반드시 정답은 둘 모두가 된다. 세츠나에게 있어 가장 소중한 존재는, 凛音일 수도 있고 リンネ일 수도 있다. 그것을 판단하는 것이야말로 이 작품의 가장 궁극적인 선택지가 될 것이다.
그래서 나는 고-가 이 작품의 마지막에 그 선택지를 배치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둘 모두를 구원할 수는 없다. 왜냐면 세츠나라는 존재는 단 하나기 때문에. 그리고 이 양자택일이야말로 이 작품의 꽃이라고 생각했다. 결과는 들어맞았다. 내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형태로.
바로 정답을 하나라고 제시한 것이다. 위에서도 이야기했다시피 루트상으론 분명 凜音 루트와 リンネ 루트 모두 존재한다. 하지만 이야기 구조상 명백하게 凜音 루트는 힘을 뺐다. 갈등 해결도 터무니없게 해결했다. 아무리 봐도 배드 엔드 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는 고-가 왜 이런 선택을 했는지 원망스럽기까지 하다.
고-는 둘 모두를 거의 동일한 무게로 다루었어야 했다. 린네(凜音)와 린네(リンネ)는 서로 다른 사람이다. 저 둘은 결코 같지 않다. 그리고 세츠나는 둘 모두를 사랑했다. 플레이어 역시 다 싫은 경우가 아니라면, 둘 모두를 좋아하거나, 혹은 둘 중 한 사람을 좋아했을 것이다. 그러나 고-는 リンネ에게만 무게를 두었다. 이는 정말 큰 실책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リンネ 엔딩도 허술한 부분은 있다. 가령 어머니로서의 '린네', 쿠온의 분노를 달래는 방법이 너무나도 터무니없었다는 점. 쿠온이 '세계를 구하는 것'에 얼마나 큰 가치를 두고 있는지는 안다. 린네와 그것만이 세츠나가 없는 시간을 견뎌올 수 있었던 원동력일 테니까. 하지만 고작 그것만으로 세츠나와의 벽이 깨진다는 것은 좀 아리송하다. 그래, 배선 문제 하나로 이 갈등이 사라진다는 것은 아무리 봐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 이후의 이야기가 매력적이었기 때문에 넘어갔지만.
그리고 가장 의문이었던 점은 역시 '2만 년 주기의 윤회'. 2만 년 주기에 거의 유사한 아일랜드와 우라시마가 조성되는 것은 어떻게 설명하련 지는 좀 의문이었는데, 결국 설명하지 않고 넘어갔다. 이 작품을 오컬트에 가깝다고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이유. 그 부분은 좀 많이 아쉽다. リンネ가 타임리프 하기 때문에 두 린네는 설명할 수 있지만, 주변 인물들은 어떻게 설명할 방법이 없다.
원초의 세츠나에 대한 해결도 하지 않았다는 점도 아쉽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과거 여행'으로 문제를 해결한 것이 아니라 최초의 세츠나에 대한 해결 부분이 불가능하지 않다는 점이다. 다만 최초의 세츠나가 1999년에서 22016년으로 동면할 때 동면 장치를 어디서 구했을까 하는 의문이 남긴 한데, 뭐 그 부분은 알아서 잘 해결하겠지. 팬디스크에서 이 부분에 대한 이야기를 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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