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마츠츠미 (アマツツミ)
인간은 본디 선한 존재인가, 악한 존재인가? 서브컬처의 많은 작품들은 캐릭터를 조형할 때 '처음부터 선한 존재'와 '처음부터 악한 존재'로 나누어서 캐릭터를 형성하는 경향이 강하다. 물론, 악역들이 '사실은 이러이러한 이유로 나쁜 짓을 했다'라는 것을 이야기하여 악당 캐릭터들에게 일종의 면죄부를 부여하는 작품들도 많지만 본질적인 의미에서 인간의 선과 악을 동시에 다루는 작품은 서브컬처에선 생각보다 드문 편이다.
인간이 선한 존재이냐 악한 존재이냐를 정확히 정의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지만, 우리는 살아가면서 인간이 그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은 선과 악을 동시에 혼재한 존재임을 어렴풋이 깨닫는다. 이 세상엔 완전히 선하기만 한 존재는 없고, 완전히 악하기만 한 존재는 없다. 그에 가까운 사람만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인간이라는 주제에 대해서 이야기하자면, 필연적으로 이런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으리라.
<아마츠츠미>는 바로 이런 '인간'에 대한 이야기다. 성욕(쾌락 추구)를 제외한다면 철저하게 '인간적인 면이 배제된', 신이라고까지 불리는 주인공인 마코토와 히로인 호타루를 통해 아마츠츠미는 인간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인간다움이 결여된 주인공이 사람들과 커뮤니케이션을 하면서 점점 인간 다워지는 모습을 통해, 그리고 상반된 호타루의 이야기를 통해서 말이다.
서론은 제쳐두고 작품에 대해서 이야기해보자. 사실 초반 이야기에서 느껴지는 이 작품의 가장 핵심적인 소재는 '언령'이라고 불리는 능력인데, 이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무시하고 말하는 대로 이루어지는 힘을 일컫는 말이다. 처음에는 이 언령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구성될 거라고 생각했지만, 갈수록 언령은 단순한 도구로 전락하고 만다. 마지막 루트인 호타루의 이야기의 경우엔 그야말로 이야기를 구성하기 위해 도입한 장치라고 확신하게 될 정도.
말의 힘이라는 주제와 인간의 자유의지를 억압하는 그 특성을 살린다면 언령만으로도 괜찮은 주제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실질적으로 언령이 이야기에서 주제로 작용하지는 않는다. 언령으로 인해 어떠한 갈등이 생겨 나는 경우는 있어도 언령 그 자체에 대해 통찰하는 이야기는 극히 드물었다. 그리고 코코로 엔드 이후에는 언령은 단순히 극을 이끌고 나가기 위한 편리한 도구 정도로 사용되었다는 점은 상당히 아쉬웠다.
또한 대부분의 에로게가 공통 루트의 끝단을 기점으로 개별 루트로 퍼져나가는 구조를 하고 있는데 반해 아마츠츠미의 경우 기본 일자 구성에서 개별 루트가 중간중간에 분기되는 구조를 취하고 있다. 이 부분은 장단이 있는 편인데, 아마츠츠미에서는 단점이 너무 크게 부각되지 않았나 싶다. 일단 시나리오의 비중 자체가 호타루 한 명에게 지나치게 크게 쏠려있는데다, 나머지 루트는 공통 루트에서 거의 대부분의 갈등을 소비해서 정작 본인 루트로 들어가 버리면 H신만 연발하다가 작은 갈등 하나가 나오고 끝나버린다. 이걸 일자형 구조로 만들어 놓다 보니 메인 스토리를 따라가다가 삼천포로 잠깐 빠졌다가 다시 돌아오게 되는 이상한 구조를 갖게 되었다.
프롤로그 부분까지는 굉장히 몰입력 있지만, 프롤로그가 끝난 이후 호타루 루트까지는 상당히 기운 빠지는 이야기의 연속. 다른 히로인들의 갈등이 가볍다는 것은 아니나, 다루고 있는 주제들이 호타루 END 2의 결론을 내릴 수 있는 주인공을 완성하기 위한 '성장의 발판'의 역할을 하고 있는 주제다 보니 다소 뻔한 면도, 그리고 심심한 면도 없지 않았다. 더군다나 개별 루트는 이 공통 루트에 비해 더 단순하다 보니 상대적으로 비교가 되는 것이 사실. 복선 배치와 복선 회수의 경우 굉장히 말끔했지만(기본적으로 이전 루트에 의문을 제시하고 다음 루트에 정답을 가르쳐 준다) 이런 맥빠지는 개별 루트로 인해 그 부분이 다소 죽어버린다는 점은 분명 큰 단점이다. 이렇게 배치할 거라면 최소한 개별 루트 쪽에도 공통 루트의 그것과 비견될만한 갈등을 넣어뒀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싶다.
그리고 갈등의 해소를 전적으로 '언령'에 의지하고 있다는 점과 인물들의 감정 변화가 개연성이 좀 떨어진다는 부분 또한 아쉬운 부분이다. 특유의 분위기를 통해 이 부분을 감추려고 하고 있지만 코코로나 쿄코의 경우 감정 변화가 좀 극심한 편이 아닌가 싶다. '언령'을 통한 왜곡에 의해 태어나는 현상이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적당한 계기 정도는 마련해 두는 게 좋지 않았을까 싶다.
이런저런 아쉬움이 있긴 하지만 결국 가장 중요한 '테마'를 어떻게 풀어냈는가에 대한 문제가 이야기의 평가에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될 텐데, 안타깝게도 이 부분도 아쉬운 면이 있었다. 테마 선정 자체는 좋았고, 그걸 풀어내는 시점도 나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무대 또한 만족스러운 편이었고. 다만 이야기의 마지막까지 이어지는 흐름과 그걸 터뜨리는 힘이 좀 부족하지 않았나 싶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스포일러를 포함하여 이야기하도록 하겠다.
이야기면에서 아쉬운 부분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했지만, 전체적으로 괜찮은 편이었다고 생각한다. 특유의 분위기가 매력적이기도 하고, 다루는 테마에 있어서는 최근 서브컬처에서는 꽤 보기 드문 테마인지라 그것만으로도 플레이할 가치는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다만 몇 가지 아쉬운 부분만 좀 어떻게 했더라면 내게 있어선 최고의 작품들로 손 꼽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너무 강하게 남는 것뿐.
캐릭터의 경우엔 개인적으로 이 작품에서 가장 칭찬하고 싶은 부분인데, 잘 만들었다. 특히 박수치고 싶은 것은 역시 호타루라는 캐릭터. 약간 편법을 쓰긴 했지만 인간의 어두운 면과 밝은 면을 동시에 조명하는데 성공했고, 이야기 내내 개그는 물론 이야기를 이끄는 역할을 충실시 수행해낸다. 호타루를 제외하면 나머지 캐릭터들은 꽤 전형적인 클리셰를 사용한 캐릭터들이지만 그 안에서도 시나리오 라이터의 스크립트를 통해 개성을 불어넣었다는 점은 꽤 인상적이었다. 보통 에로게 하면 마음에 드는 캐릭터가 한 둘 정도에, 마음에 들지 않은 캐릭터가 하나씩은 꼭 있기 마련인데 이 작품의 경우 모든 캐릭터가 마음에 들었다는 점은 좋았다.
작화나 음악의 경우는 굉장히 만족스러운 편이었다. 쿄코의 경우 군데군데 거슬리는 부분이 있긴 했지만 그걸 제하면 꽤 만족스러운 수준. 특히 H신 관련해서 구도적으로 인상 깊었던 CG가 몇 개 있는데 하면서 감탄했다. 음, 순애게에서 이런 CG를 보는 날도 있군! 음악의 경우도 인상적인 곡이 한 네 곡쯤 되었는데 장면마다 적절한 곡이 선정되었다고 생각한다.
전작 '크로노 클락'을 하지 않아서 직접적인 비교는 어렵지만, 내가 해왔던 퍼플 소프트웨어의 작품에 비하면 꽤 기합을 넣고 만든 작품이 아닌가 싶다. 위에서 많이 까긴 했지만, 이게 다 아쉬워서 하는 이야기고 작품 자체는 비교적 괜찮고 테마도 만족스럽다. 다만 분위기에 얼버무리는 부분이 좀 있는 편이고 테마를 표현해내는 부분에 있어서 아쉬운 점이 있다는 게 안타까울 따름. 이 부분이 개선되었다면 정말 멋진 작품 하나가 등장했을 것이다. 그래서 더더욱 아쉬움이 남는 작품이기도 하다.
그 이상은 말하지 말아 주세요.
먼저 말해두지만 전 오늘 일을 잊을 거에요.
내일 이후 학원에서 만나더라도 오늘 일이 없었던 것처럼 행동할 거에요.
호타루는 거짓말이 특기니까, 오늘 일이 꿈이었던 것 처럼.
절대로 그걸 신경쓰지 말아주세요.
하지만 후회하고 있는 건 아니니까요.
오히려 너무 행복해 오늘의 추억을 보물상자에 넣어두고 싶은 기분이니까요.
고마워요. 나를 상처입혀주어서. 나를 만나러 와줘서.
당신과 만나서 난 행복해졌어요.
이 작품에서 <인간>이라는 테마를 다루는데 있어서 가장 핵심적인 부분은 위에서 언급했다시피 주인공인 마코토와 히로인인 호타루에 있다. 마코토는 인간다움을 배제한 캐릭터 조형이 핵심이고 호타루의 경우 오리지널 호타루와 호타루를 분리하는 것으로 인간의 추악한 면과 아름다운 면을 동시에 부각한 케이스라고 할 수 있다.
호타루 END1과 END2를 분기하는 선택지는 다름 아닌 '오리지널 호타루의 부정'이다. 오리지널 호타루와 호타루는 별개의 인물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녀 둘은 동일 인물이다. 다만 처한 상황만 다를 뿐. 이를 통해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인간의 본성을 묘사하면서 동시에 인간의 추악한 점과 아름다운 점이 혼재한다는 것을 표현했다.
그렇기 때문에 END1과 END2를 가르는 선택지는 중요하다. 내 입맛에 맞는 그녀만을 긍정할 것인가, 아니면 있는 그대로의 그녀를 긍정할 것인가의 문제기 때문이다. 이는 나아가 한 개인의 인간관을 묻는 질문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처음 이 선택지가 등장했을 때는 정말 박수쳤다. 내가 바라는 이상에 정확히 부합하는 질문이었기 때문이다.
다만 END1, END2 모두 상당히 미적지근한 대응으로 끝났다는 점이 아쉬운 점이다. 먼저 END1의 경우 '오리지널 호타루'의 부정으로 이어지는 이야기인데, 그 결론이 언령을 통한 오리지널 호타루와 호타루의 교체라는 점. 특히 이 과정에서 '오리지널 호타루'를 부정하는 마코토가 최후에 오리지널 호타루를 수용함으로써 그녀를 지우는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END2의 경우에도 결말을 '두 사람이 하나가 되는 것'으로 해결하는 데, 이 부분이 인간으로써 결말을 맞이하는 것이 아닌 신의 능력으로 결말을 맞이한다는 것에서 주제 표현에 약간 흠집이 나지 않았나 생각한다. 마코토는 신인 것을 버려가며 호타루들을 구원하여 '인간성'을 확보했지만, 호타루의 경우 사실 신인 마코토가 일방적으로 구원해준 것에 가까운 모양새가 되었기 때문이다.
다만 이 경우 미카게가 이런 결말을 낼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라고는 생각한다. 오리지널 호타루 쪽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언령'의 도움 없이는 두 사람을 모두 구할 수는 없었다. 차라리 오리지널 호타루가 '나쁜 쪽'을 담당하게 된 이유가 수명이 아닌 다른 무언가였다면 좀 더 괜찮은 방향으로 극을 진행시킬 수 있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가장 좋은 모양새는 쿄코 루트에서 그러하듯, 오리지널 호타루 쪽의 생각이 변화하고 호타루가 그걸 긍정하며 사라져가는 모양새였다고 생각하는데, 오리지널 쪽이 수명이 제한되어 있다 보니 생명을 늘리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으리라. 아니면, 프롤로그 때처럼 마코토가 수명을 모두 사용하는 것으로 오리지널 호타루 쪽을 구원한다는 선택지도 괜찮았을 것 같긴 한데 이것 역시 좀 미묘하긴 했을 듯.
설정 몇 가지를 조금 바꿔서 엔딩까지의 길을 비틀었다면 주제 표현에 더 좋았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특히나 테마가 내가 가장 좋아하는 테마 중 하나이다 보니 더더욱 그런 것 같기도.
여담이지만, 작중에서 언령(=신의 힘)으로도 생명의 연장 혹은 창조까지는 불가능했는데 호타루 쪽은 분신을 창조해서 거기서 생명을 얻었다는 시점에서 이미 일종의 생명 연장, 창조 수준까지 간 게 아닌가 싶기도. 이 부분에 대한 묘사가 상당히 빈약했던 지라 분신 호타루 쪽이 대체 어디서 생명력을 얻어서 오리지널 쪽에 공급했는지 알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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