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풍경의 바다의 아페이리아 (景の海のアペイリア)
나는 과학을 참 좋아한다. 전공도, 목표로 하는 직업도 과학에 관련된 직업이고, 서브컬처를 제외한다면 내가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분야도 과학이다. 그렇기 때문에 과학을 소재로 한 서브컬처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과 두 번째로 좋아하는 것을 융합한, 나의 궁극의 취향이라고 할 수 있는 그런 존재다.
그러나 동시에 안타깝게도 이런 과학을 소재로 하는 서브컬처의 수는 많지 않다. 거기에서 옥석을 가리려고 한다면 '옥'이 될만한 작품은 더더욱 없다. 아무래도 매력적인 소재이긴 하나, 제대로 살려내기 힘든 소재인데다 작가의 사전 조사가 굉장히 중요한 소재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소재를 잘 살리더라도 정작 본론인 '이야기'가 재미없다면 의미가 없어진다. 결국 좋은 과학 서브컬처 작품이란, 본질인 이야기도 재미있으면서 소재인 과학을 잘 살려야 한다는 터무니없는 조건이 붙게 된다.
그런데 그 터무니없는 조건을 잘 살려낸 작품이 종종 등장하곤 한다. 게임에 한정해서 이야기한다면, 타임 리프를 다룬 <슈타인즈 게이트>와 같이. 에로게에서는 소재로 자주 등장은 하는데 자신 있게 소개할만한 작품은 드물다. 하지만 이제는 할 수 있다.
바로 이 작품 <풍경의 바다의 아페이리아>가 그 주인공이다.
<풍경의 바다의 아페이리아>는 과학적인 소재를 굉장히 잘 살려냈다. 주요 소재는 AI(인공지능), 클론 기술, 타임리프, 양자역학이다. 앞선 셋 모두 현대에서 굉장히 관심이 높은 소재이고 양자역학 역시 친숙하진 않지만 많은 매력을 지닌 소재다.

특히 놀라운 부분은 이 소재들을 굉장히 정확하게 사용한다는 점인데, 인공지능도 강 인공지능과 약 인공지능을 나누어서 다루고, 양자역학 역시 유사과학으로 빠지기 쉬운 부분인데 상당히 정확히 사용한다. 그리고 이 부분을 게임 내에서 상당히 친절하게 설명하는 편이라 과학에 흥미가 있는 플레이어라면 게임 내에서 무언가를 배울 수 있을 만큼 잘 다루고 있다. 거기다 그걸 세계관으로 잘 활용하고 있기 때문에 더더욱 고평가 할만하다.
그러나 이런 요소들을 아무리 잘 다뤘다고 하더라도 작품 자체가 재미없다면 의미가 없다. 하지만 이 작품은 굉장히 재미있다. 특히 인상적인 부분은 그냥 재미있는 게 아니라, 개그와 이야기의 재미 둘 모두를 잡아냈다는 점이다.

개그의 경우 굉장히 인상적이었는데, 이 작품은 시작하자마자 웃긴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 개그를 처음부터 끝까지 유지한다. 중반을 넘어가면 상황이 심각해지고 이야기가 무거워질 수밖에 없는데 이 개그를 적재적소에서 잘 활용해서 웃음을 유발하고, 다소 지루할 수 있는 부분도 웃음으로 넘길 수 있게 해준다.
거기에 이야기도 뒤지지 않는다. 이 작품의 이야기는 굉장히 치밀하게 구성되어 있다. A라는 의문이 생기면 A'라는 단서가 등장하고, 이 둘을 조합해 문제를 해결한다. 그러나 해결하고 나면 거기서 새롭게 확장된 B라는 의문이 등장한다. 그렇게 작은 지점에서 출발해서 이야기가 진행되면 진행될수록 이야기는 점점 깊고 넓어진다.
또한 작품 내에 반전의 수가 너무나 많은 데다 적과의 심리전이 굉장히 잘 짜여있어서 몰입감이 상당하다. 의혹이 시작되고 나면 거기에서 연쇄되는 심리전과 반전으로 인해 플레이를 도중에 멈추기 힘들 정도로. 거기다 놀랍게도 이 심리전과 반전의 연쇄에 대한 복선은 정말 착실히 잘 깔려있다. 한번 더 플레이하면 탄성이 나올 정도로.
이렇게 개그와 이야기 둘 모두를 잡은 작품이라 흥미로운 후반부를 위해 초반부를 억지로 플레이할 필요가 없다. 이 부분이 바로 이 게임의 큰 강점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재미있는 작품은 굉장히 드문데, 이 작품이 바로 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칭찬만 했는데도 그치지가 않는다. 캐릭터 역시 잘 만들어졌다. 에로게라는 매체 특성상 캐릭터의 매력은 굉장히 중요한데, 이것마저 흠잡을 부분이 없다. 특히 잘 만들어졌다고 생각하는 캐릭터는 역시 주인공과 아페이리아. 주인공은 지금까지 플레이 한 에로게를 모두 통틀어도 한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을 만큼 유쾌하고 매력적이었다. 아페이리아는 AI라는 캐릭터성을 이렇게 잘 살린 캐릭터는 에로게 역사상 유일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잘 만들어졌다. 행복하다는 표현을 '아페이리아는 행복이 있습니다(アぺイリアは幸せがあります)'로 표현하거나 긍정을 포지티브 입니다(ポジティブです)로 표현하는 등 AI라는 캐릭터성을 굉장히 귀엽게 잘 표현해냈다. 거기에 딸 같은 포지션을 부여해서 플레이어로 하여금 특별한 감정을 품게끔 했다는 점도 매력적이었다.
다른 히로인들도 상당히 잘 만들어졌다. 주인공을 혐오할 때 빛나는 여동생인 미우와 응석 부리고 싶어지는 매력과 중2병을 모두 간직한 소꿉친구인 쿠온. 그리고 자존감이 떨어지는 모습을 귀여움으로 승화시킨 마시로까지. 특히 셋은 개별 루트에서 각자의 컨셉에 맞는 멋진 이야기도 같이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적 캐릭터로 등장하는 싱커 역시 굉장히 매력적인 캐릭터다. 개인적으론 주인공과 아페이리아 다음으로 잘 만들어졌다고 꼽고 싶을 정도로. 철저하게 주인공의 대척점에 서있는 캐릭터인데 작품 내에서 주인공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있다는 모순이 참을 수 없이 매력적이다. 거기다 작품 내 마지막에 보여주는 모습은 이 작품 최대의 명장면 그 자체. 잘 만들어진 적 캐릭터는 이야기의 매력을 배로 증가시킨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싱커가 갖는 의미는 너무나도 크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대로 <풍경의 바다의 아페이리아>는 이야기, 개그, 캐릭터, 소재 뭐 하나 빠질 것 없이 모두 뛰어난 작품이다. 당연히 이걸 모두 합쳐놨으니 좋은 작품일 수밖에 없다. 다만 아쉬운 부분이 없진 않은데, 그 아쉬운 부분이란 건 아이러니하게도 장점이라고 칭찬한 이야기와 소재에서 비롯된다.
이야기가 굉장히 치밀한 탓에 조금만 방심해도 이야기를 놓치기 쉽고, 소재가 아무래도 간단한 것도 아니고 정확하게 구사하려는 탓에 작품 내에서 과학에 대한 설명이 많이 나온다. 그래서 플레이하면서 머리를 상당히 많이 써야 하기 때문에 아무래도 플레이어에 따라 불만이 나올 수 있다.
또한 결말 부분에서 아마 제작 비용상의 문제로 생략이 좀 많았는데, 개인적으론 납득 가는 범위의 문제였고 이전의 이야기가 너무 좋았기 때문에 괘념치 않았지만 다소 의아하게 느껴지는 플레이어가 있을 수 있다곤 생각한다. 이런 부분이 걸리지 않는다면 그 이외엔 두드러지는 단점은 없는 편이다.
개인적으론 별 이변이 없다면 올해 최고의 작품이 되지 않을까 한다. 시작하자마자 터지는 개그에서 마지막 스탭롤 이후의 최후의 한 컷까지. 정말 처음부터 끝까지 즐거웠던 작품이다. 특히 엔딩 스탭롤 이후 한 컷은 이해한 뒤에 탄성이 나왔다. 시나리오 라이터가 처음 맡았던 작품인 <그 맑게 갠 하늘보다도 높이(あの晴れわたる空より高く)>도 즐겁게 플레이했는데 세 번째 작품인 이 작품에선 더 멋진 작품을 보여주어서 앞으로가 기대된다.
다정함 플러스, 슬픔 마이너스 이콜 제로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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