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x친애 그녀 (恋×シンアイ彼女)
거두절미하고 본편만 놓고 보자면 이 작품은 별로였다. 그림과 음악은 물론 말할 필요가 없이 최고였지만, 정작 시나리오가 문제였다. 유이와 린카루트는 지루하기 짝이 없었고, 개연성은 심각할 정도로 나빴다. 아야네는 캐릭터가 워낙 좋아서 즐겁게 하긴 했는데, 시나리오만 놓고 보면 사실 매우 단순한 이야기였다. 거기다 극 중 클라이맥스인 아야네가 노래 부르러 올라가는 장면은 이해를 포기할 정도로 막 나가는 장면이었다. 그냥 전반적으로 캐릭터가 만들어가는 이야기가 아니라, 이야기에 끼워 맞춰 캐릭터가 움직이는 인형극의 느낌이었다. 이야기로써는 도저히 좋게 평가해줄 수가 없는 그런 이야기.
다만 에필로그에선 상황이 달라진다. 그전까지가 쥐어 짜낸 이야기라면, 여기서부터는 폭주해서 쓰고 싶은 이야기를 썼다는 느낌을 주는 이야기였다. 컨셉 자체는 취향이었다. 앞부분의 아쉬움을 날려줄 정도로. 문제는 그게 상업 게임에서 바람직한가 묻게 된다는 점이지만.
세상에는 다양한 사랑의 형태가 있다. 그건 동화책에 나올 법 한 행복한 사랑일 수도 있고, 불타는 감정은 없지만 정 들어서 함께하는 것 또한 사랑의 형태 중 하나겠지. 사랑의 수만큼이나 많은 사랑의 형태가 있을 거다. 개중에는 결실을 맺지 못하는 사랑도 존재할 것이고, 몇 번이고 만나고 헤어지는 반복하는 사랑이 있을 수도 있다. 그리고 이 작품은 바로 그런 '일반적이지 못한 사랑의 형태'를 다루고 있는 작품이다.
본편 세나 루트 마지막 부분에서 세나와 코타로는 헤어진다. 어릴 적, 아무 말도 없이 떠나갔던 그녀 그대로 이번에도 아무 말없이 떠나간다. 에필로그는 그녀가 떠나간 이후의 코타로를 그리는 이야기다. 에필로그에서 다시 한번 코타로는 세나와 만나고, 사랑을 하고, 또다시 실연을 한다. 그리고 포기하지 않고 그녀를 쫓는 그런 이야기다.
시나리오 라이터가 의도한 바가 정확히 무엇인지─단순히 유저를 골리고 싶었는지, 아니면 어떠한 감정을 공유하고 싶었는지, 혹은 자신의 경험을 다시 써 내려갔던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내 추측이 맞는다는 하에 이 작품을 시나리오 라이터의 의도대로 감상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전제조건이 필요하다. 첫째, 강렬한 첫사랑을 경험해봤을 것. 둘째, 실연을 해 봤을 것. 셋째, 그러고도 상대를 사랑해봤을 것. 이 세 가지 전제 조건이 성립해야만 본 작품의 코타로의 마음에 공감을 할 수 있다는 거다.
한 마디로 정리하자면 이 작품은 플레이어의 경험에 몹시 의존하는 작품이다. 화자이자 주인공인 코타로를 이해하는데 필요로 하는 플레이어의 경험이 너무 특수하다. 에필로그의 코타로는 학생인 세이카에게 이런 말을 한다.
나는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글은 쓸 수 없었지만
학생 한 사람을 뭉클하게 만드는 이야기는 쓸 수 있다고 생각해서, 써봤어.
이 말은 딱 이 작품을 설명하는 말 그 자체라고 생각한다. 이 작품은 보편적으로 사람을 감동시킬 수는 없는 이야기다. 경험이 없다면 혹은 가치관이 맞지 않다면 감동은커녕 불쾌감만 주는 작품이기 때문에. 그런 점에서 니이지마 유우는 여기서 첫 번째 실수를 했다. 분명 모든 사람을 감동시키는 글 따위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고, 일정 부류라도 감동시키면 성공이라고는 생각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특정 부류의 사람을 제외한 나머지를 불쾌하게 만드는 글이라면. 그것도 일종의 속임수였고 이 작품이 상업 작품이라는 점을 상기한다면 그건 최악의 수다. 자신의 작품을 선택해 준 유저에 대한 배신이다.
두 번째로 이야기할 것은, 그래서 그 전제 조건을 모두 만족시켰다면 쉽게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인가 하는 문제다. 고백하자면 나는 본편에서부터 이 작품의 화자인 코타로에 대해서 깊은 공감을 했다. 그의 성격이나 습성, 취향까지 나와 몹시 흡사하다. 첫사랑에 얽매여있었던 시기가 있었다는 점까지. 그렇다면 나는 이 작품을 내 이야기처럼 애절하게 느낄 수 있었을까? 아니다.
에필로그의 히로인인 세나는 에로게에서는 보기 드문 편인 능동적이고 입체적인 캐릭터다. 그녀 자신이 또 하나의 주인공이라고 봐도 무방하지 않을 정도로. 그녀에게는 '음악'이라는 추구하는 가치가 있고, 이를 실현하는 동료가 있다. 그리고 그것들과 주인공의 사랑을 무게추에 올려놓고 저울질을 해가며 선택을 하는 캐릭터다. 굉장히 현실적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작품 안에서 주인공인 코타로와 세나는 동등한 위치에 있는 캐릭터라고 볼 수 있다. 그걸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문장이 바로 이거다.
지금까지 상상해본 적이 없었다.
세나는 그 편지를 실제로 어떤 표정을 하면서 읽었던 걸까.
대답의 여부에만 집착한 나머지 그 순간을 상상해보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캐릭터로서의 입장은 동등하더라도 연애관계에 있어 입장은 전혀 동등하지 않았다. 이 작품을 플레이하고 나면 한 가지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세나는 정말 코타로를 사랑했을까?'하는 의문. 화자가 코타로로 제한되어 있어서 코타로가 세나를 생각하는 마음은 정말이지 낯부끄러울 정도로 많이 등장하지만, 세나의 이야기는 거의 등장하지 않아서 플레이어는 온전히 추측으로 그녀의 마음을 헤아릴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확언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내 안에서는 이렇게 결론을 내리고 있다. 코타로를 향한 세나의 마음은, 코타로가 세나를 생각하는 마음과는 비교할 수 없이 작을 거라고.
그녀는 코타로를 일종의 히어로나 뮤즈 정도로 보고 있다. '힘들 때 나를 구하러 와주는 왕자님', '내게 예술의 혼을 불어넣어 주는 뮤즈' 정도.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힘들 때 언제나 코타로를 그리고, 마지막 수단으로 그를 찾아와 사랑을 하고, 음악성을 되찾아 다시 떠난다. 물론 '가슴은 아프겠지만'. 사랑에 무게를 재는 것은 굉장히 싫어하는 행위지만, 굳이 재어보자면 결국 음악과 동료가 우선이었던 거다. 작중에 지나가듯한 묘사로 등장하는 문장이 있다.
세나라면 사랑보다 우정을 선택하는 타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이 잘못되었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가치관은 사람마다 다르니까. 하지만 적어도 코타로와 세나는 연애에 있어서 결코 동등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이것이 니이지마 유우의 두 번째 실수다. 그녀는 사랑하는 사람인 코타로에게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않는다. 오로지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결정하고, 스스로 실행한다. 그 과정에는 코타로의 의사는 전혀 없다. 코타로와는 연인이지만, '대화' 하나 없이 홀로 결정하고 홀로 실행하는 것이 과연 두 사람이 동등한 사랑인지 의문이 남을 수밖에 없다.
작중의 코타로는 세나에게 빠져있으니 느끼기 힘들지만, 그걸 지켜보는 플레이어라면 어렴풋한 느낌이라도 들게 된다. '세나는 코타로를 좋아하는가?'하는 의문이. 그렇다면 그때부터 이 작품에 대한 몰입은 지독하게 힘들어진다. 코타로와 같은 상황에 놓여본 경험이 있더라도, 세나의 모습을 보면 코타로를 응원하기가 몹시 힘들어진다. 보고 있으면 이런 말해주고 싶다. "정신 차려 임마" 세나를 한결같이 그리는 코타로의 모습이 아름다워 보일 수는 있어도, 코타로와 세나의 이야기가 아름다워 보일 수는 없었다.
에필로그에 등장하는 다른 캐릭터들의 모습도 아쉽다. 에필로그는 온전히 코타로와 세나, 두 사람의 이야기지만 또 하나 비중 있게 등장하는 캐릭터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바로 코타로의 학생, 세이카다. 그녀는 늘 가면 속에서 살아왔고, 부모님 앞에서조차 그 가면을 벗을 수 없었던 소녀였다. 그리고 그런 그녀가 겨우 가면을 벗고 진실된 모습으로 설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코타로 앞이었다. 에필로그에서 갑자기 신캐릭터로 등장해 엄청난 존재감을 내뿜고 긴장감을 조성하더니 결국 그녀의 역할은 코타로가 르포라이터가 되는데 공헌 하나 한 정도. 이럴 거면 이 캐릭터 왜 만들었냐고 물어보고 싶었다.
이 작품에 대해 좋은 평가를 하는 사람이라면 아마 이 이야기의 형태에 주목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작품에 대해 혹평을 하는 사람이라면 아마 코타로와 세나라는 인물에 주목을 했을 거고. 관점에 따라 충분히 견해가 갈릴 수 있는 작품이긴 하다. 하지만 주인공의 감정을 이해하는데 필요한 전제조건이 많은데다, 그걸 만족하더라도 '공감'을 하기가 어려운 이야기라면, 나는 이야기의 형태가 아무리 멋지더라도 그 작품을 좋아할 수는 없었다.
혹평만 잔뜩 적어 두었지만 그래도 인상 깊었던 점이라면, 모두가 안정적인 작품만 만들어내는 와중에 새로운 시도를 했다는 점. 비록 이야기 내적으로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이 있었지만, 이런 형태의 시도는 만족스러웠다. 사랑에 다양한 형태가 있는 것처럼, 마냥 행복한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흔들리고 다치는 이야기도 그 나름의 매력을 갖고 있으니까. 그리고 사랑이라는 감정의 형태와 그것을 전달하는 방법에 대해 생각해보게 해준다는 점도 매력적이다. 다만, 그걸 위해 플레이어를 (나쁜 의미로) 속이는 건 문제지만.
둘째는 플레이어의 경험을 끌어내어 공감시키려는 작품이라는 점이다. 이 작품에 대한 호평 속에는 반드시 이것도 포함되어 있을 거다. 그 '특별한 감수성'을 깨울 수만 있다면, 플레이어는 다소 이야기가 흔들려도 감동받을 수 있으니까.
감상을 정리하자면 주인공과 히로인의 완전무결한 사랑이 아닌, 다소 현실적인 흔들림을 담아낸 '연애 이야기'를 창조해냈다는 점은 굉장히 좋았다. 특히 첫사랑의 설렘과 그걸 이뤄내는 과정이 정말 마음에 들었다. 문장도 부분 부분 굉장히 좋았고. 다만 이야기 내적으로 끝내 코타로와 세나의 사랑을 응원할 수 없었기에 좋은 평가를 내어줄 수는 없을 것 같다. 이 작품으로 엄청나게 욕을 먹고 있던데, 다음에는 부디 더 좋은 모습으로 니이지마를 만났으면 좋겠다.
언제나, 그녀와 나 사이엔 말로는 할 수 없는 무언가가 가로막고 있다.
그것을 뛰어넘기 위해선 역시 무언가 답이 될 수 있는 말이
필요한 걸지도 모른다.
지금의 우리들은, 그 말을 발견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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