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분명, 흐림없이 맑은 아침색보다도 (きっと、澄みわたる朝色よりも、)
이제 와서 이런 말하긴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어릴 적부터 나는 멋진 세계를 동경하는 아이였다. 아주 어릴 적부터 TV나 밖에 나가 노는 것보다 책을 읽던 아이였고, 그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것은 동화나 따스한 이야기였다. 그게 어찌하다 서브컬처로까지 옮겨붙게 되었고 지금의 내가 된 것이다. 이 모든 과정 속에서 내가 동경했던 것은 하나뿐이었다. 바로 다정한 세계다. 빈말로도 내가 살아온 세상은 아름답다고만 할 수는 없는 세계였고, 그건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다. 내가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이야기 속의 세계는 언제나 동경의 대상이자 나의 꿈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슈몬 유우라는 시나리오 라이터를 좋아하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은 자명 한 일이었다. 그가 그리는 세계는 내가 꿈꾸는 세계 그 자체였으니까.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인연(絆)과 다정함(優しさ)을 주제로 삼는 이야기. 누군가는 현실적이지 않다고 비판할지도 모르지만, 한없이 투명하고 아름다운 세계를, 인간에 대한 믿음을 끝까지 저버리지 않는 이야기가 그의 이야기이다. 그런 이야기이기 때문에 나는 그의 이야기를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 <분명, 흐림없이 맑은 아침색보다도>는 슈몬 유우의 정수라고 할 수 있는 작품이다. 지금까지 여러 이야기에서 보여 준 그의 테마 그 자체를 작품화한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작품은 바로 사람과 사람의 인연, 그리고 다정함을 그려내고 있는 작품이다. 그것도 은유적으로 표현해내는 것이 아니라, 아주 노골적으로. 주제 그 자체가 '다정함이란 아픔을 수반하는 일'인데다, 작중 배경 자체가 '다정한 세계'니까.
이것이, 친구.
히요가 계기를 주었다.
하루츠게가 더 넓혀 주었다.
그리고 아라라기가, 알려주었다.
아아, 내게는 친구가 세명이나 있다.
나는 그 날, 모르는 눈물을 흘렸다.
내가 모르는 눈물들이, 많이, 많이 흘러넘쳤다.
그 날, 내게도 친구가 생겼던 것이다.
이 이야기는 '다정함'을 모르고 자란 한 소년이, 세 소녀를 만나 다정함이란 무엇인지 배워나가는 이야기다. 그 과정 속에는 많은 악의가 기다리고 있다. 때로는 그 악의에 굴복하기도 한다. 하지만 혼자가 아니기에, 친구의 힘을 빌려 다시 일어서고 화내고 용서하고 이해하며 다정함을 이해하고 그 다정함을 퍼뜨려나가는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의 가장 매력적인 부분은 바로 이 설정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이걸로 한 다섯 번째 플레이한 것 같은데, 플레이할 때마다 감탄을 금할 수 없는 설정이다. 네 명의 소년 소녀로 구성된 '사군자'라는 설정이나, 주인공인 스우 사사마루의 이름에 들어가는 한자인 조릿대(세, 笹), 그리고 병과 저주. 이런 배경 설정들이 이 이야기의 주제인 인연과 다정함을 너무나도 정확하게, 그리고 아름답게 표현하게끔 만들어 주었다. 이것 이외에도 '소꿉놀이'같이 캐릭터들이 빛나게 만들어주는 설정 또한 이 작품의 매력 중 하나다.
그리고 이 설정을 잘 살린 이야기 역시 이 작품의 백미 중 하나다.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구간은 역시 두 번째 장. 세 번째 장 이후로는 약간 개연성이 뒤떨어지는 부분이 있지만, 두 번째 장의 경우 구성은 물론이고 이야기, 감동 모두 퍼펙트에 가까운 완성도를 보여준다. 특히나 사군자의 과거 이야기를 다룬 부분은 소꿉친구 팬으로써 칭찬을 하지 않을 수가 없는 훌륭한 장면이다. 물론 후반부의 시리어스 한 전개도 매우 훌륭하다. 세 번째 장과 에필로그 역시 앞의 두 번째 장에 비해 부족함이 느껴진다는 것이지 그 자체로 보면 정말 훌륭한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캐릭터 역시 이 작품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다. 시나리오 라이터 공인, 이 게임의 장르명은 '히요게임'인데 그 장르명 그대로 이 작품에서 가장 매력적인 캐릭터는 역시 쿠미가미 히요. 나의 오타쿠 인생에 걸쳐 만난 최고의 소꿉친구 캐릭터다. 소꿉친구가 가질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매력이자 무기인 '인연'을 가장 잘 그려낸 캐릭터다. 일방적으로 기대는 관계가 아닌, 서로가 서로를 지지하며 같이 앞으로 나아가는 두 사람의 이야기에는 반할 수밖에 없는 매력이 있다. 또한 히요뿐만 아니라 다른 사군자인 아라라기나 하루츠게 역시 굉장히 매력적인 캐릭터고, 조연들 역시 저마다의 이야기가 있기 때문에 굉장히 매력적이다.
이제서야 깨달았다.
이제서야, 이 아픔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
모두가 있었기에 깨달을 수 있었다.
그렇기에 지금은 이 아픔조차 사랑스럽다.
이 아픔은, 내가 그렇게 원하던 것을 얻었다는 증거니까.
물론 이 작품이 완벽하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이 작품은 많은 비판을 안고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그중 가장 치명적인 문제는 역시 이 작품이 에로게로써는 0점에 가깝다는 사실이다. 이 작품은 히요 단일 루트로 구성되어 있다. 아라라기나 하루츠게, 아오 자매라는 매력적인 캐릭터를 만들어 놓고도 단일 루트인데다 H신의 경우 총 3개인데 하나는 미수(?)로 끝나버렸고, 하나는 개그(?)로 끝나버렸고, 나머지 하나만이 제대로 된 H신이라는 점에서 에로게로서는 0점에 가깝다. 그렇기 때문에 발매 직후 엄청난 비판이 몰려왔고 슈몬 백수 전설이 시작된 것이다.
다만 역으로 말한다면 그 에로게로서의 부분'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이 작품은 크게 눈에 띄는 단점은 보이지 않는다. 이 작품을 혹평하는 사람들의 상당 부분이 바로 저 부분을 비판하고 있기 때문에. 그 이외의 가장 큰 단점이라고 한다면, 슈몬 특유의 전개의 경우 개연성이 다소 떨어지는 부분도 있기 때문에 그 부분을 상상력으로 메꿀 필요가 있다는 것 정도라고 생각한다. 이 부분을 감안할 수 있는 플레이어라면 아마도 이 작품을 사랑할 수 있으리라.
떠올렸다.
다정함에는 아픔이 수반된다는 사실을.
이 세계에는 아픔이 없다.
누군가와 서로 접하지 않으니까. 아픔이 생겨날리가 없다.
상처입는 일도 없는 평화로운 세계. 매우 시시한 세계.
누구나 저마다 사랑하는 작품이 존재한다. 그건 그것의 완성도와는 별개로, 작품 그 자체를 좋아할 수 있는 작품. 내게 있어서도 그런 작품이 몇 가지 존재하는데 이 작품이 바로 그 대표적인 예시다. 비록 많은 비판을 듣고 있는 작품이긴 하지만, 내게 있어선 이 작품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멋지고 사랑스러운 작품이다. 이 작품이 그려낸 세계를 여전히 동경하고 있다. 몇 번을 다시 플레이하더라도 빛이 바래지 않는 그런 눈부심을 간직한 작품이다. 어쩌면 이런 작품을 만났기 때문에, 내가 아직까지 오타쿠 컬처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바라건데, 이런 멋진 작품을 다시 만날 일이 있기를.
──그것의 모양은 사람마다 다르다.
그 속에는.
자기를 희생하는 것으로 성립되는 다정함이 있었다.
자신을 마모하는 것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돕는 것으로 성립되는 다정함이.
하지만 그 다정함은 서로 나누는 것이다.
서로가 서로를 위해, 필사적으로 자신을 내어준다.
자신이 불행하게 되어서라도 상대방이 행복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두 사람이서 함께 행복하게 되도록.
──우리들은 그것이 가능하다.
왜냐면 우리의 마음은 이미 이어졌으니까.
우리는 그걸 의심하지 않으니까.
지금까지 히요가 쌓아온 것.
지금까지 내가 쌓아온 것.
그런 상대를 사랑했으니까, 분명, '그것'에 조금이라도 가까워졌으리라.
서로가 서로를 위할 수 있다.
그런 시행착오 위에 이 세계는 만들어지고 있다.
그런 식으로 이 세계는 완성되고 있다.
──그러니까 이 세계는, 이렇게도 다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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