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쿠라의 시 -벚나무 숲 위를 흩날리다- (サクラノ詩 -櫻の森の上を舞う-)
그것이 허무하다면 허무 자체가 그러하니 어느 정도는 모두에게 공통될 것입니다.
(모든 것이 내 안의 모두이듯이, 모두가 각자 속의 전부니까요.)
작품은 미야자와 겐지의 <봄과 아수라: 서[春と修羅-序]>의 3연 마지막 문단을 인용하며 시작한다. 작품의 첫머리는 굉장히 중요하다. 작품의 전체적인 이미지를 결정짓기 때문이다. 작품은 왜 이 문장을 인용하면서 시작한 것일까?
이 작품은 전작 <멋진 나날들~불연속 존재~>의 테마였던 '멋진 나날들'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지난 글에서 표현을 빌려 오자면, 멋진 나날들이란 자신의 의지로 운명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닌, 삶의 주인이 자신임을 천명하는 삶이다. 전작품은 그곳에 이르는 과정을 그려내는 작품이었지만, 이번에는 그 멋진 나날들 안에서 '말할 수 없는 것'의 너머를 만들어내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려냈다.
본 작품의 테마는 예술이다. 예술을 기반으로 한 여러 주제들의 이야기가 펼쳐지고 마지막에는 미美에 대한 견해의 차이, 물질과 마음, 자연과 예술을 바라보는 시각이 대 주제로 부상한다. 특이하게도 '공통루트'에서는 질문을 던지고 '개별루트'에서는 새로운 주제를 보여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그렇다면 각 챕터에 담겨 있는 이야기가 어떤 것들인지 알아보자.
1장 Frühlingsbeginn
사랑하는 이가 죽었을때는,
자살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사랑하는 이가 죽게 되면,
그 방법 외에는,
다른 도리가 없습니다.
1장은 나카무라 츄야의 <춘일광상> 첫머리를 제시하며 시작한다. 사실 이 작품에 한정해 <춘일광상>에서 더 중요한 부분은 후에 나오는 '봉사의 정신'이 핵심이지만, 이는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줄기이므로 후에 이야기하도록 하자. 그 외에는 기본적으로 작품 배경 소개와 캐릭터 소개로 이어지지만 중요한 테마가 두 가지 존재한다. 바로 '영적 창작의 연쇄'와 '예술이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이다.
Frühlingsbeginn라는 부제는 독일어로 '봄의 시작'이라는 의미로 아돌프 뵈트거의 시에서 따온 제목이다. 이 시는 후일 로베트르 슈만의 <교향곡 제1번 op.38 봄>의 모티프가 된다. 이를 스카지는 '영적 창작의 연쇄'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작품에서 나오야를 수식하는 용어인 '인과 교류의 예술가'의 또 다른 변주다. 하나의 작품에서 새로운 다른 하나의 작품이 촉발되어 나가는 것. 이는 유미주의에서 작품의 형식적 미의 절대성을 강조하여 상대적으로 감상자의 필요성이 존중받지 못하는 것에 대한 반박이다.
왜냐하면 <봄의 시작>이라는 시의 감상자였던 슈만이 <교향곡 제1번 op.38 봄>이라는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내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즉, 예술에서 감상자란 단순히 보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닌 새로운 작품을 촉발시켜 낼 수 있는 제작자이며 나아가 새로운 작품이 아니더라도 비평 등을 통해 새로운 인식을 만들어낼 수 있는 존재자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작중 나오야가 '인과 교류의 예술가'라고 불리는 것은 이 작품의 가장 큰 대주제를 함축한 것이고, 1장에 이런 부제를 담은 것은 이 작품 전체의 주제와 방향성이 바로 그것이라는 의미가 된다.
또한 1부에서 개그씬으로 조용히 넘어가지만 굉장히 중요한 부분이 하나 있다. 바로 토마스가 나오야와 대립하는 부분이다.
"너답지 않아. 애당초 여장이니 여자니 뭐니를 그리고 싶다면서 붓을 든 저열한 인간은 이 부에 필요 없어. 동기가 너무 불순해."
"세계적인 예술가 켄이치로 쿠사나기의 아들이라 들었는 데, 그 정도는 아니었나 보네요우"
"뭐라고?"
"헤이 유! 다시는 예술을 논하지 마라 허접쓰레기야!"
"너야말로 어디서 예술을 논하지나 마라고"
"유방이 있었기에 내는 화가가 되었지."
"!"
여장한 케이나 유미하리 미술부원 여학생들을 데생 하고 싶어 하던 토마스를 불순한 의도라고 비하하며 미술부에서 필요 없는 존재라고 비하한다. 그리고 이에 대해 토마스는 인상파 거장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의 말을 인용하며 나오야에게 반격하자 나오야는 할 말을 잃는다.
이 지점에서 이 작품은 플레이어에게 질문을 던진다. 노골적으로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는 토마스가 예술가라고 칭하면 일반적으로 거부감을 느끼겠지만, 마찬가지로 같은 이유로 예술가가 된 르누아르는 역사에 인상주의의 거장이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예술이란, 아름다움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여성의 가슴을 그리는 것은 예술이 아닌 것인가? 그렇다면 예술은 무엇인가? 르누아르는 가슴이 있었기에 화가가 되었다는 말을 남겼는데, 그렇다면 르누아르는 예술가가 아닌 것인가? 이러한 질문을 통해 이 작품의 주제 중 하나인 '예술이란,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를 초기부터 플레이어에게 각인시킨다.
2장 Abend

2장은 공통 루트의 마지막으로 클라이맥스를 담당하고 있는데, 바로 <벚꽃의 발자국>을 완성시키는 챕터다. <벚꽃의 발자국>은 이 작품의 주제 의식을 극명하게 드러냄과 동시에 '사쿠라의 각'과 이어지는 구도를 만들어내는 중요한 작품이다. 이 작품을 만들어내는 것을 통해 역시 예술에 대한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지금까지 붓을 꺾은 네가……. 뭘 안다고…….
작품을 만드는 의미에 대해, 뭘 안다고 지껄이냐…….
네게 작품이란 많은 사람에게 알리기 위한 작품이냐? 대서특필되려 만드는 작품이냐?
저걸 뭘 위해서 만들었는지……. 내가 저 작품을 누굴 위해 완성했는지…….
작품이란 무엇인가? 그 말, 네게 그대로 돌려 주마.
너는 그 말뜻을 정말 알고서 하는 소리냐?
다른 이를 위한 작품이 아냐. 멀리 있는 누군가를 위해 그린게 아냐….
저건 코마키, 코사치, 그리고 저 녀석들을 구해 준 마사다 신부님을 위해 만든 거다……. 다른 무엇도 아냐.
그러니 이젠 내가 작가일 필요가 없지.
내 이름이 남을 필요가 없어.
납득을 못하겠나? 그럼, 너는 예술가로서 삼류 이하다.
작품이 무엇을 위해 태어나는가, 무엇을 위해 만들어지는가……
우리가 무엇을 위해 작품을 만드는가…… 그것만 잃지 않으면 괜찮아…….
거기에 새겨진 이름이 자기 이름이 아닐지라도…….
아카시와 유미하리 미술부원들이 작품을 완성시킨 후, 이 작품을 쿠사나기 나오야의 이름으로 발표하려고 하자 반발하는 나오야에게 아카시가 한 말이다. 굉장히 노골적으로 쓰인 대사인데, 당시 나오야는 이를 이해하지 못하다가 후에 6장에서 '벚꽃의 발자국'을 새로 만들어 낸 후에 이를 깨닫고 나카야마 카나에게 다시 되돌려주는 상황이 만들어진다.
이는 이 작품에서 강조하고 있는 예술, 작품의 역할을 잘 표현해주고 있는 대사다. 이를 통해 '예술 작품은 무엇인가? 예술가는 작품을 왜 만드는가?'라는 질문을 남긴다. 1장에서 던진 질문이 근본적인 질문이라면, 2장에 와서는 더 세분화된 질문을 남기는 것이다. 여기에서 아카시는 작품이 무엇을 위해 태어나고, 무엇을 위해 만들어지는 지만 알고 있다면 그것이 예술로서 성립하고 그곳에 새겨진 이름이 자신의 이름이 아니어도 상관없다고 이야기한다. 나오야는 이를 이해하지 못하다가 후에 깨닫게 되고, 이에 대한 답변은 6장에서 이어진다.
3장 Pica Pica

3장 Pica Pica는 마코토의 개별 시나리오다. 개별 시나리오에서는 '질문'이 아니라 '답변'을 하거나 혹은 새로운 주제를 제시한다. 마코토 시나리오의 모티프는 작품 <달과 6펜스>이다. 이 작품은 폴 고갱의 일생에서 모티프를 받아 그려진 작품으로 현실을 버리고 타히티로 예술을 좇아 떠난 예술가의 이야기를 그렸다. 작가 서머셋 옴은 '달'로 상징되는 예술가적 본능과 '6펜스'로 상징되는 속물적인 주변 인물들을 모두 비판하는 차원에서 작품을 만들었지만, 이 작품에서는 조금 다른 식으로 사용된다.
마코토는 예술을 통해 구원받은 사람이다. 또한 어릴 때부터 '달'을 동경하던 소녀였기에 나오야나 케이에 대한 집착이 아주 강하다. 마코토는 그야말로 자신의 모든 것을 던져서라도, 그것이 설사 자신이 동경하고 사랑하던 나오야와의 사랑이라 할지라도 모든 것을 바쳐서 나오야가 예술을 하길 바랐던 소녀다. 하지만 이 루트에서 끝내 나오야는 그림을 그리지 않는다. 나오야는 마코토만을 위한 그림을 그리겠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마코토는 그것에 납득하며 이야기는 끝난다.
<누운 벚꽃>의 시를 떠올리며 무어 전을 되돌아보았다.
나는 무어 전에 그림을 내지 않았다.
토리타니의 <두 천재>는 유미하리 학원의 역사에 이름을 남길 수 없었다.
허탈했겠지만, 그럼에도 마음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마코토는 사랑 외에 아무것도 손에 넣지 못했다.
하지만 그 사랑이, 내게 평화로운 시간을 가져다준 것만 같았다.
마코토를 사랑해서 다행이었다.
나와 마코토 사이에는 사랑 외에 아무것도 없었다. 다른 깊은 인연, 상처, 과거, 아무것도 없다.
그렇기에 나는 마코토에게 그림을 그리지 않겠다고 말할 수 있었다.
오로지 마코토를 위해서 그림을 그리겠다 말할 수 있었다.
그렇게 생각했다.
이 평생을 다해 단 한 명, 너만을 위해 내 모든 그림을.
이 시나리오가 보여주는 것은 '가치 있는 삶 만이 의미 있는 삶은 아니다'라는 명제다. 사쿠라의 시 안에서도 굉장히 이질적인 메시지인데, 이 작품은 전체가 예술을 테마로 하는 작품이지만 마코토 루트에서는 이 예술 역시 절대적인 정답은 아니라고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달'에 빠져 현실을 내버린 폴 고갱의 위대한 업적만이 옳은 것이 아니라, '6펜스'를 선택한 나오야와 마코토 역시 옳다고 주장하는 시나리오다. 많은 사람들이 이 이야기를 배드 엔딩 같다고 표현하지만, 사실 작품의 의도는 이것 또한 긍정된다는 의미다. 이는 전작 <멋진 나날들>에서 주장했던 행복한 삶과 동일한 구조를 같고 있다.
이는 6장 나오야의 대사를 통해서도 다시 드러나는데, 나오야는 프리드먼에게 폴 고갱은 불행한 삶을 살았으며 린에게는 그런 삶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평가한다. 나오야에게 예술이란 절대적인 무언가가 아닌 일종의 수단으로 쓰인다는 이야기다. 그렇기 때문에 예술에 몸을 바치는 것이 아닌, 마코토를 위한 그림을 그리는 것 또한 나오야의 예술관에 부합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3장 Olympia

3장 Olympia는 미사쿠라 린의 개별 루트다. 이 에피소드에서는 나오야가 왜 미술을 포기했는지, 오른손을 사용할 수 없는지. 스이의 정체는 무엇인지, 천년 벚꽃이란 어떤 것인지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다만 시나리오적 완성도는 그리 높은 편은 아닌데, 미사쿠라 린의 개별 에피소드지만 여기에서 등장하는 미사쿠라 린은 반쪽짜리이기 때문이다. 6장에서 각성한 이후 미사쿠라 린의 캐릭터 성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에 클리어 한 이후의 평가가 낮아질 수밖에 없는 에피소드. 또한 메인 테마인 예술에도 부합하지 않아서 전형적인 세계관 설명 에피소드기 때문에 좀 안타깝다. 어차피 사쿠라의 각에서 린 에피소드가 이어질 테니 상관없다고 판단했던 걸까.
미래를 위해 선택할 수 있는 게 한 가지밖에 없다면,
그게 어떤 결과를 낳든지 무관하게 그것 하나만이 올바른 미래겠지.
그 이외에는 없으니까.
당연히 나중에 성을 내거나 후회하기는 하겠지만…….
그래도 아마 그건 아니다 싶어.
선택한 걸 후회해 봤자 어쩌겠어. 다른 미래는 없으니까.
올바른지 아닌지는 그 선택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받아들이는 태도일 뿐이야…….
중요한 건 만사를 선택하는 게 아냐.
선택한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
올바르게 미래를 받아들이는 거야.
핵심 주제는 위에서 한 나오야의 대사와 같이 '올바른 선택보다 선택을 받아들이는 태도가 더 중요하다'로 요약할 수 있다. 나오야는 예술가로서의 핵심 중의 핵심인 오른팔을 잃었지만, 자신이 한 행위에 후회는 없고 그저 담담히 받아들였다. 그것이 옳다고도 표현하지 않는다. 단지 자신은 선택을 하고, 그 선택을 받아들이는 것뿐이다.
반면 미사쿠라 린은 자신으로 인해 오른 팔을 잃은 나오야에 대한 죄책감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방황하다가 건물 옥상에서 떨어지는 위기에까지 처한다. 그리고 이를 구하는 나오야와 나오야가 한 말로 인해 자신의 상황을 받아들이고, 남은 여생을 나오야를 위해 살아가기로 다짐하면서 미래를 받아들이며 끝난다.
사실 유난히 나오야의 영웅적 면모가 드러나는 에피소드인데, 반면 미사쿠라 린이 너무 수동적으로 비치기 때문에 밸런스가 조금 아쉽다는 생각이 든다.
3장 ZYPRESSEN & Marchen

3장 ZYPRESSEN과 Marchen은 히카와 리나와 카와치노 유미의 개별 루트다. 종이 인연극을 활용한 연출이 특히 돋보이고 작품 모든 루트에서 '아름다움'이라는 요소 하나만 놓고 본다면 가히 최고였다고 평가하고 싶다. 모티프가 되는 작품은 빈 센트 반고흐의 <사이프러스와 별이 있는 길>, 미야자와 겐지의 <봄과 아수라>, <쏙독새의 별>, <은하 철도의 밤>. 그리고 샤를 페로의 <빨간 두건>이 주요 모티프로 들어갔고 나아가 나카하라 츄야의 <지난날의 노래> 중 <춘일광상>에서도 일부 차용했다.
전체적으로 시적인 표현과 유미의 독백, 모티프를 그대로 가져온 것이 아닌 작품의 테마에 맞게 적절히 뒤튼 센스까지 거의 완벽했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빨간 두건>의 모티프를 뒤튼 '흰 버섯의 빨간 두건 소녀' 리나와 늑대에서 소녀가 된 유미라는 컨셉이 훌륭했고, 고흐의 죽음의 상징이었던 사이프러스를 불사와 재생으로 뒤엎어버린 나오야의 작품까지 모티프의 반전을 이용해 작품에 꼭 맞는 에피소드를 그려냈다고 생각한다.
나아가 선천적인 병을 앓고 있는 리나, 선천적으로 성정체성이 레즈비언인 유미라는 캐릭터를 통해 보편적이지 않은 세계의 모습을 그려냈다는 점도 플러스 요인이다.
“이렇게 미친 태풍이 부는 바람이라면──. 그래, 꽃을 달아도 괜찮은 시기가 되지 않았나 싶었어.”
벚꽃의 예술가가 그렇게 말했다.
"……벼, 별이 아니었어……?”
“그래, 별 아냐. 여기 그린 건 모두 벚꽃잎이지. 지금은 모르겠지만, 여긴 측백나무와 같이 벚나무도 엄청 많거든. 내가 여기다 작품을 그리기 시작했을 땐 벚꽃이 만개했지.”
“그래서……”
“그뿐만이 아냐. 애초에 네게 별은 어울리지 않아.”
“제게?”
“별님이 되고 싶어서 안달 난 꼬맹이에게 별이 어울리겠냐. 너 같은 애는 꽃이 필요해. 그것도 봄에 피는 꽃이.”
"벚꽃이 아름다운 까닭은 그것에 죽음을 느꼈기 때문……”
“그런 소릴 했던 소설가도 있었지. 그런데, 그 인간은 벚꽃을 보고 죽음을 느낀 덕에 그 아름다움을 경쾌하게, 극히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데 성공했어. 벚꽃은 죽은 사람에게 바치기엔 너무 눈부셔. 살아 있는 인간에게 걸맞지……”
ZYPRESSEN의 주제는 '예술이 사람을 구원할 수 있는가'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작품의 대주제와도 맞닿아 있는데, 작중 리나는 죽음을 두려워하던 소녀였지만 벚꽃의 예술가 쿠사나기 나오야와 만나 죽음의 이미지를 강렬한 삶의 이미지로 승화시키는 데 성공한다. 단 하나의 예술 작품이 어느 한 소녀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꾼 것이다.
또한 대 주제 이외에 다른 주제를 훌륭하게 표현해 낸 것이 유미가 리나를 포기하는 장면이다. 여기서 유미는 천년벚꽃에게 힘을 빌어 자신의 마음을 성취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포기한다. 왜냐면 그것이 진정으로 상대를 사랑한다는 것이라는 것을 유미는 깨달았기 때문이다. 작품 내에서는 천년 벚꽃이 만들어내는 기적의 왜곡을 유미가 포기하는 형식을 갖추고 있지만, 주제 의식 측면에서는 남들과 다른 사랑을 하고, 그 사랑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해 온 유미가 자신만의 정답을 찾아내는 장면인 것이다. 그래서 이 부분이 인상적이다.
Marchen은 다소 독특한 구조를 취하고 있는데, 이에 대해 시나리오 라이터 스카지는 백합 루트라는 것이 미소녀 게임을 구매하는 층에게는 요구되지 않는 시나리오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납득 가는 이야기를 쓰기 위해서 이러한 결정을 내렸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그렇다 보니 Marchen은 존재 자체가 조금 이상한 구조를 갖고 있다. 대표적으로 ZYPRESSEN 루트에서 소개되는 측백나무를 벚꽃으로 바꾸는 나오야의 예술로 히카와 리나는 흰 버섯의 소녀가 아닌 평범한 소녀로 돌아왔다. 하지만 Marchen에서는 어찌 된 일인지 히카와 리나는 흰 버섯의 소녀인 채로 남아 있고, 그렇기 때문에 유미의 마음이 리나에게 받아들여지게 된다.
엄연히 이야기 작법적으로는 굉장히 잘못된 방식이다. 이런 억지를 써가면서까지 유미의 캐릭터성을 지키기 위해 백합 루트를 만들어야 할 이유가 있을까? 그걸 해내기 위해서 스카지는 하나 트릭을 사용했다. 바로 Marchen은 유미의 꿈에 해당하는 루트다.
가을의 밤은 머나먼 저편에
조약돌만이 가득한 강변이 있고
그곳엔 햇살이, 사르르 하고
사르르 비춰지고 있었습니다.
햇살이라 했지만, 마치 규석인지 무엇인지
평범하지 않은 무언가의 분말 같아서
그야말로 사르르 하고
희미한 소리를 내고 있었습니다.
자, 조약돌 위에는 지금도 나비 한 마리가 머물고,
어렴풋하면서도, 그리고 또렷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습니다.
이윽고 그 나비가 보이지 않게 되자, 어느샌가,
지금까지 흐르지 않았던 강바닥의, 물은
사르르 하고, 사르르 흘러가고 있던 것이었습니다.
"그건…"
"나카하라 츄야야…"
"응, 알아. 나도 <지난날의 노래>는 수없이 읽었으니까…"
"왜 그걸 지금 읊었어?"
"별 의미는 없어…. 애초에 이 시가 무슨 뜻인지도 잘 모르겠고…."
"모르지만 말해 봤다는 거네…."
"응."
"누군가에게 어울리는 시 같아."
"그럴 수도 있겠네…."
나는 리나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다.
가을밤. 어느 저편.
밤을 사르르 비추는 햇살…….
<하나의 메르헨>
그래. 이것은 하나의 메르헨이다.
나는 그렇게 이해했다.
Marchen 루트에서 유미가 인용하는 시는 바로 <하나의 메르헨>이다. 이는 나카하라 츄야의 시인데, 유미는 이 시가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다고 하지만 바로 뒤에 자신은 이것이 하나의 메르헨이라고 이해했다고 표현한다. 시의 3연과 4연을 보면 알겠지만, 이 시는 3연까지의 상황이 꿈같은 것이었다는 사실을 표현하고 4연에서 그 꿈에서 깨어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밤을 사르르 비추는 햇살'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그야말로 역설적인 상황이다. 즉, 작중 유미는 지금 자신이 처한 사실이 꿈이라는 사실을 자각하고 있다는 의미다. 더 나아가 스카지는 하나 더 힌트를 숨겨 두었는데, 그것이 바로 배경이다.

위의 배경 CG는 Marchen 루트에서 다시 한번 측백나무 숲에 방문한 유미가 '하나의 메르헨'을 읊을 때 나오는 배경 CG이고, 아래 배경 CG는 다른 루트에서 배경 CG로 사용된 그림이다. 보면 알겠지만 중앙의 오리온자리를 기준으로 플레이아데스 성단과 시리우스가 좌우 반전된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현실세계 북반구(일본)에서 볼 수 있는 별자리의 모습은 당연히 아래의 모습이다.
즉, Marchen 루트는 노골적으로 작품 내 현실세계가 아님을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이후 결말부에서는 유미하리 옥상에서 유미가 나카무라 츄야의 <지난날의 노래>에 포함된 <춘일광상>의 2번째 단을 읊고 옥상에서 책을 버리는 것으로 이야기는 끝이 난다. ZYPRESSEN에선 천년 벚꽃의 힘을 포기한 유미와 달리, Marchen에는 그 꿈의 행복에서 벗어나지 못해 '이러면 안 되는 것 아닐까'하고 자조하면서도 <하나의 메르헨>이라는 꿈임을 자각할 수 있는 책을 던지고 끝난다. 일종의 배드 엔딩에 해당하는 결말이라고 생각하는 데, <멋진 나날들>에서 보여준 멀티 엔딩 구조의 작품론적 의미를 생각해 보면 상당히 아쉽다는 생각이 든다.
3장 A nice Derangement of Epitaphs
3장 A Nice Derangement of Epitaphs는 나츠메 시즈쿠의 개별루트다. 하지만 나츠메 시즈쿠의 개별루트로 동작한다기보다는 쿠사나기 나오야의 과거에 좀 더 집중하고 있는 에피소드다. 쿠사나기 켄이치로와 쿠사나기 나오야, 그리고 나츠메 일가에 얽힌 비밀들이 드러나고 <벚꽃 6상도>를 제작한 나오야와 그 주변 인물들의 반응을 통해 '예술 작품에서 진품과 위작이란 어떤 의미인가?', '이를 결정짓는 요인은 바로 무엇인가?', '예술의 가치는 무엇인가?'를 주제로 다루고 있다. 특히 쿠사나기 켄이치로의 말을 빌려 예술의 참된 가치와 본질에 대해서 노골적인 이야기를 다룬다.
예술은 관람으로 완성 돼.
작품은 시체야. 다만 썩지 않는 시체지.
아름다운 표본 같은 거라 보면 돼.
시체는 시체. 아무리 완성도가 높아도 시체야.
그러니 세계가 닫혀 있다면 그건 영원히 시체에 불과해.
굳이 말하자면 말이지.
하느님이 실제로 존재하고, 그 하느님이 만약 완전하다면 말이야.
이 세계를 하느님이 만들 이유가 있겠어?
자기 혼자서 완전하잖아. 그럼 다른 건 필요 없지.
신이 세계를 창조할 이유가 없어.
특히 미사쿠라 린의 '유미주의'와 반대되는 개념인 '상대주의'와 같은 개념을 나오야에게 많이 언급한다. 이를 통해 쿠사나기 가문의 예술가들은 '상대주의'의 신봉자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미사쿠라 린은 관객이 없어도 미는, 예술은 그 자체로 의미를 갖는다고 표현하지만 쿠사나기 가문의 예술가들은 사람들이 관람을 통해 그 안에서 메시지를 찾아낼 때 비로소 예술은 의미를 갖는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고 작품의 클라이맥스는 바로 <벚꽃 6상도>의 완성이다.

"이것에 내 이름을 새기겠어."
"그래. 그러면 이 6부작도 위작으로 완벽해지겠지."
"위작으로 완벽해? ……아니, 아니야."
"뭐야? 부족한 데 있어?"
"그래, 이건 위작으로는 너무나도 부족해."
"그럼 안 되지. 빨리 수정을……."
“멍청아. 이걸 어떻게 수정하냐. 이건 내 거라고…….”
"내 거?"
“희대의 사기꾼에게 걸맞은 최후구만……이건 네가 나에게 바친 묘비명이야. 그러니까 나는 여기다 내 이름을 새길 거다. 이건 내 작품이 아냐. 내 죽음을 위해 쿠사나기 나오야가 그려 준 작품이야. 내 묘에는 꽃이 넘쳐나겠지. 하지만 그건 포장이야. 진짜 묘는 이 그림 옆에 있어. 오늘 밤, 방금 전에 내가 죽는 꿈을 꿨어. 그런데 이상한건, 그건 내가 행복하게 살던 순간이었어. 나오야, 고맙다. 내게 걸맞는 그림이야. 이런 그림이 바로 내 죽음에 바칠 수 있는 작품이지. 좋은 인생이었어. 이런 일도 생기니까…….”
“…….”
“그림은 참 좋아……. 많은 사람들은 감정에 말을 담아 말하지. 하지만 발화란 건, 이건 꽤 허무한 거야. 그러니까 많은 현자들은 침묵하지. 불필요한 말은 몸을 혼탁케 한다. 혼탁한 몸에서는 연기 같은 말만 태어나지……. 하지만 예술에 불필요한 말은 필요 없어. 맑은 의지만이 떠오르지. A Nice Derangement of Epitaphs. 이 작품은 그렇게 다뤄지겠지……. 하지만 그거면 됐어. 이건 날 위한 묘비명이니까. 난 곧 죽는다. 길었던 듯하면서도 무척 짧게도 느껴지지만. 아니, 그래도 역시 길었지……. 그런 느낌이야. 이렇게 마지막 자리에 다다르고 나니까 여러 의미를 알겠어. 고맙다. 나오야. 내가 할 말은 딱 그거뿐이야.”
목이 메었다.
나는 말을 꺼낼 수 없었다.
“평생 그림을 그리길……잘했네. 그래, 잘했어.”
위작으로 그려 낸 <벚꽃 6상도>를 보고 켄이치로는 이걸 위작이 아니라 자신의 작품이라고 부른다. 분명 쿠사나기 켄이치로를 사칭하고, 그의 화풍을 훔쳐내 만든 작품임은 틀림없다. 하지만 거기에 담긴 메시지가 진짜라면, 이것은 훌륭한 예술이라고 칭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작품에는 쿠사나기 나오야가 나츠메 시즈쿠를 위하는 마음, 그리고 자신의 아버지 쿠사나기 켄이치로를 위하는 마음이 담겨 있는 작품이다.
그리고 후반부에는 이 작품의 핵심 키워드, <인과 교류의 색채>가 등장한다. 시즈쿠와 린의 과거 이야기를 통해 나오야가 어떤 존재인지, 어떤 예술가인지가 드러난다. 나오야가 지금까지 그려온 작품은 <앵일광상>, <한 여름의 그림>, <벚꽃 6상도>, <벚꽃의 발자국>, 그리고 후에 등장하는 <나비를 꿈꾸다>로 총 5 작품이다. 이 모든 것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모두 다른 누군가를 위해 만들어낸 작품들이다. <앵일광상>은 죽은 어머니를 위해, <한 여름의 그림>은 리나에게 생명력을 주기 위해, <벚꽃 6상도>는 나츠메 시즈쿠를 구하기 위해, <벚꽃의 발자국>은 아카시와 그의 여동생들을 위해, <나비를 꿈꾸다>는 나츠메 케이의 바람에 응답하기 위해서다.
이는 쿠사나기 나오야가 단독으로 오롯이 존재하는 예술가가 아니라 항상 누군가를 위해 그림을 그려온 예술가라는 것을 잘 보여준다. 그리고 <앵일광상>에서 구원받은 마코토, <한 여름의 그림>에서 구원 받은 리나, <벚꽃 6상도>로 구원 받은 시즈쿠, <벚꽃의 발자국>에 구원받은 아카시 남매, <나비를 꿈꾸다>에 살아 있다면 보답받았을 나츠메 케이까지. 쿠사나기 나오야의 작품은 다른 사람들을 구원하고 나아가 새로운 예술 작품을 만들어 낼 수 있는 토대를 만들어 내는 '인과 교류의 전등' 그 자체인 것이다.
4장 What is mind? No matter. What is matter? Never mind
4장은 쿠사나기 켄이치로와 쿠사나기 미즈나의 만남을 다룬 에피소드다. 이 에피소드의 핵심 테마는 바로 물질과 마음이다. 이는 아주 오래전부터 수많은 철학자들이 다뤄온 유물론과 유심론, 혹은 이원론에 관한 이야기이다. 나츠메 미즈나는 계속해서 물질과 마음의 경계에 대해 고민해 왔다. 그녀는 스스로 몸이 더럽혀졌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를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널 괴롭힌 것도 네 마음이지만, 널 행복하게 만드는 것도 네 마음이야. 마음을 싫어하면 안 돼. 그렇다고 마음이 사라지지는 않아. 그저 마음이 아플 뿐이지. 자신의 몸을 싫어하면 안 돼. 그러면 네 마음이 괴로워할 뿐이니까…….”
“마음을 싫어해도, 몸을 싫어해도, 결국 아픈 건 마음……이네요.”
“그래. 네가 네 자신을 싫어하면 싫어할수록 네 마음만 아파. 마음은 몸이 아냐. 몸은 마음이 아냐. 하지만 마음은 몸이고 몸은 마음이야. 다르면서도 똑같아. 말투의 차이거나 혹은 엇갈린 말이거나 그런 거지. 그러니까 미즈나 너는 네 몸을 아껴 줘. 네 마음을 아껴 줘.”
“제 몸과 마음을 아끼라고요?”
“그래. 자신을 괴롭히지 말고, 자신을 가두지 말고. 더 행복하게 살아도 돼.”
“제가 행복하게?”
“그래. 더 행복해도 돼.”
여기서 켄이치로는 미즈나에게 마음은 몸이고 몸은 마음이라는 일원론을 제시한다. 이는 스피노자의 사상에 짙게 영향을 받았는데, 작품 후반부에 등장하는 '영원의 상' 역시 같은 맥락에서 해석될 수 있다. 마음은 무엇인가? 물질은 아니다. 물질은 무엇인가? 결코 마음은 아니다. 이는 버트랜드 러셀의 저작에서 가져온 말인데, 위의 맥락대로 해석하자면 마음과 물질은 서로 다른 존재이다. 그러나 마음은 무엇인가? 아무래도 좋아. 물질이란 무엇인가? 신경 쓰지 마. 이렇게 해석한다면 마음과 물질의 구별이 의미 없는 행위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상적 기반은 후에 자연과 예술의 일원론으로 이어진다.
작품 내적으로는 정말 좋아하는 에피소드인데, 일단 켄이치로가 너무 멋있게 나온다. 사실 이 작품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캐릭터는 바로 쿠사나기 켄이치로다. 정말 동경할 수밖에 없는 남자의 모습.
5장 The happy prince and other tales
5장은 나츠메 케이와 쿠사나기 나오야의 이야기다. 개인적으로 5장은 구성 면에서 문제가 좀 있다고 생각하는 편인데, 일단 하나의 에피소드에 주제를 너무 많이 함축시켰다. 대표적인 주제로는 '한 인간이 영웅적 삶을 살기 위해서 포기해야 하는 것', '평범한 사람이 예술적 가치를 좇기 위한 방법', '유미주의와 상대주의'와 같은 테마를 한 에피소드에서 모두 풀어내고 있다. 그러다 보니 이야기가 좀 산만해졌다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특히 이질적인 파트가 '유미주의와 상대주의'에 대해 논하는 파트인데, 아예 별개의 챕터로 분할하는 게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나, 나는…… 틀렸다고 하면 안 됐는데…… 미안, 아이. 그렇게 말해서…. 나, 나는… 왜 이렇게 약할 까. 왜 이렇게 약한 인간일까. 내가 틀렸다고 말하면, 그런 말을 하면 걔네들이 어떤 마음일지 다 알았으면서… 나는, 나는 너무 약하니까…”
“그런 말 마. 너는 지금까지 너무 잘 버텨 줬어. 그런 널 보고 모두가 네 마음이 강철인 줄 착각했던 거야. 하지만, 그래서 다들 마음 놓고 구원을 받았어. 넌 항상 강했으니까. 넌 강해. 누구보다도 강해. 약하지 않아. 그런데 나오야, 모두에게 강할 필요는 없어. 너는 그 굳센 마음으로 많은 사람들을 구했지만, 그래도 가끔은 다른 사람에게 맡겨 봐. 약해도 돼. 모든 사람 앞에서 강할 필요 없어. 어떤 사람 앞에서는 약해져도 돼, 나오야.”
첫 번째 주제는 나츠메 케이의 죽음으로 인해 무너진 쿠사나기 나오야의 모습에서 풀어낸다. 나오야의 삶은 나카하라 츄야의 <춘일광상>에 나오는 봉사의 마음으로 풀이할 수 있다. 하지만 당연히 그림을 좀 잘 그릴뿐인 일반인인 나오야에게는 분명한 한계가 존재한다. 그 한계 이상으로 나오야도 켄이치로도 살아왔기 때문에 계속해서 잃어버리는 것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본디 사람인 영웅은 흔들리기 마련이다. 그것을 표현해 낸 것이 위의 장면이다.
개인적으로는 작품에서 반드시 필요했던 에피소드라고 생각한다. 특히나 '봉사의 마음', '인과 교류의 예술가'로 칭해지는 쿠사나기 나오야는 너무나도 완벽한 영웅상이었기 때문에 인간으로서의 면모를 한 번 부각할 필요가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에피소드는 반드시 필요했다고 생각된다. 다만 나츠메 케이가 쿠사나기 나오야의 성장에 그저 희생되었을 뿐이라는 느낌이 존재해서 이 부분만큼은 아쉽다.

범재 선배로서 충고 하나 해 드리죠.
범재는 범재의 방법이 있어요.
재능은 범재를 배신하지만
기술은 범재를 배신하지 않아요.
노력으로 얻은 기술의 체계가 바로 범재의 무기.
범재의 칼날도 천재들의 목덜미에 닿을 수 있어요.
재인은 천재를 위협하는 기술을 가졌죠.
왜냐면 재인은 범재이기 때문이에요.
그린다는 행위. 그 무한에 가까운 반복.
그것이 오직 범재가 천재를 능가하는 방법이죠.
두 번째 주제는 나가야마 카나의 모습을 통해서 드러낸다. 사실 꽤나 비극적인 캐릭터인데, 스카지의 말에 따르면 나가야마 카나는 미사쿠라 린의 수정으로 인해 생겨난 캐릭터라고 한다. 미사쿠라 린의 어두운 부분만을 따로 떼어내 만든 나가야마 카나. 그렇다보니 이 캐릭터는 존재부터가 비극이다. 예술을 보는 눈 만큼은 굉장히 훌륭하지만, 그걸 만들어낼 수 있는 능력은 가지지 못한 캐릭터다. 왜냐면 그 능력은 미사쿠라 린에게 있으니까. 그렇기 때문에 이 캐릭터는 콤플렉스 덩어리이고 평범한 사람의 시선에서는 단순히 안 좋게만 보이는 캐릭터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는 꼭 필요한 존재인데, 후에 나가야마 카나는 쿠사나기 나오야, 미사쿠라 린과 같이 하나의 미학의 축을 담당하게 되고 이건 사쿠라의 각에서도 이어지는 요소가 된다. 또한 나가야마 카나는 천재들 투성이인 작품에서 '범재'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는 캐릭터라서 중요하다. 이건 이런 류의 작품에서 소홀히 하기 쉬운 영역인데, 적재적소에 잘 배치했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나오야에게서 오른팔을 빼앗는 것으로 나가야마 카나와 같은 캐릭터도 무대에 설 수 있도록 구성한 부분 역시 훌륭하다고 생각된다.

“쿠사나기 군… 질문 하나 해도 될까?”
“어떤 질문?”
“쿠사나기 군 안에 신은 없어?”
“그 질문은 너무나도 의미가 없네…”
“그런가요?”
“너는 그림을 그릴 때, 미를 형상화할 때 그 행위의 저변에 있는 것을 ‘신’이라고 했으니까. 딱히 천국에 계신 하느님 이야기는 아니잖아?”
“응. 내가 믿는 신은 그런 거야. 사람이 무엇을 믿고 미를 창조하는지의 문제지.”
“그렇다면 나도 신은 있겠지.”
“응. 그건 알아. 하지만 쿠사나기 군의 신은 미 앞에서 심판하지도, 벌하지도 않아. 최후의 심판에 아무것도 안 하는 신…”
“최후의 심판에 아무것도 안 한다라… 아니, 그건 아니겠지.”
“그럼 해?”
“글쎄. 네 신은 초자연적이야. 그 절대적인 신을 위한 미. 사람은 그것을 형상화하지. 서양의 고대 미술, 아니 원시 종교 미술이 가진 성격이야. 그렇다면 와일드 식으로 말하자면 네 미는 이런 미야. 인간은 미를, 어쩌면 신을 모방한다. 왜냐면 미는 인간의 존재보다 아득히 이전부터 존재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수학자가 수식이 인간 존재 이전부터 완전하게 존재했다는 사실을 믿는 것과 마찬가지지. 그렇다면 내가 믿는 신, 혹은 미는 이런 걸 지도 몰라. 신은 인간을 모방한다. 그리고 미는 인간을 모방한다.”
“그렇구나. 그런 시각… 미 역시 인간이 만들어냈다는 말이구나.”
“그래, 그렇지. 인간이 만든 것이라면 완벽하지 않아. 미는 완벽하지 않고, 사람의 마음에 따라 시시각각 변화해. 인간의 미에 일관성은 존재하지 않아.”
“약한 신이구나.”
“약한 신이라… 맞는 말이네. 사람들의 마음에 따라 얼마든지 가치가 변화하는, 말하자면 헐값에 팔려나가는 신일지도 모르겠네… 미의 이데아. 그런 것이 보이는 네게는 무가치한 것일지도 모르겠네… 약한 신이야. 하지만 사람은 미와 마주한 순간, 혹은 감동한 순간. 혹은 결심한 순간. 그리고 혹은 사랑한 순간. 그 약한 신은 사람 곁에 있어. 사람과 함께하는 약한 신이지만, 그렇더라도 사람이 믿었을 때 그 곁에 있어. 사람이 만들어낸 신은 정말로 약할 수 있어. 하지만 사람이 만들어낸 신이기 때문에 사람 곁에 있지. 나는 미라는 것을 이렇게 생각해…”
“그것이 허무하다면 허무 자체가 그러하니 어느 정도는 모두에게 공통될 것입니다. (모든 것이 내 안의 모두이듯이, 모두가 각자 속의 전부니까요.). 봄과 아수라 같구나.”
“그래, 맞아…… 봄과 아수라 같지.”
“그렇구나…… (사실은, 나도 그렇지만…)”
세 번째 주제는 미사쿠라 린과 쿠사나기 나오야의 대화를 통해 드러낸다. 사실 위의 두 주제와 가장 이질적인 부분인데, 왜냐면 이는 '사쿠라의 시'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사쿠라의 각'을 암시하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별개의 챕터로 빼는 편이 주제의식면에서는 좋을 것이라고 판단했는데, 5장 마지막에 붙여뒀다.
이 부분에서는 크게 주제가 2가지가 등장한다. 첫 번째는 위에서 언급했던 유미주의와 상대주의의 대립이고 두 번째는 바로 '사쿠라의 시'라는 작품이 '행복한 왕자'를 모티프로 만든 이야기라는 것을 드러낸다는 점이다.
'사쿠라의' 시리즈에는 크게 세 가지 미학이 존재한다. 하나는 미사쿠라 린으로 대표되는 유미주의(탐미주의), 쿠사나기 나오야로 대표되는 상대주의, 그리고 나가야마 카나로 대표되는 포스트 모더니즘이 있다. 이를 작품 내에서는 미사쿠라 린의 '강한 신', 쿠사나기 나오야의 '약한 신', 그리고 나가야마 카나의 '현대 미술'로 표현한다. 그 중 두 가지의 대립을 그린 것이 바로 5장의 이 에피소드다.
위의 대화를 통해 린과 나오야는 미의 절대성과 상대성에 대해 논쟁을 한다. 둘 모두 논리적 근거가 탄탄하여 서로 한치의 물러섬도 없이 대립하지만 인상적인 것은 마지막 린의 말이다. 바로 '사실은, 나도 그렇지만…'이라고 말하는 부분이다. 이 부분은 원작 스크립트는 …………으로 표기되는데 보이스로 이야기가 나오는 장면이다.
이는 절대적 미의 체현자로 각성한 린에게 지금까지의 기억과 사상이 남아 있다는 뜻이다. 과거의 절대적인 미의 신을 안에 품고 있었던 린은 관객의 필요성을 부정했다. 하지만 린은 시즈쿠에게 그림을 보여주는 것으로, 그리고 벚꽃의 예술가 쿠사나기 나오야와 만나는 것으로 인식이 바뀌었다. 그렇기에 그때의 기억까지 합쳐져서 현재의 린이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사쿠라의 각으로 이어지는 복선을 사쿠라의 시에 남기기 위함으로 보인다.
주제 면에서는 유미주의와 상대주의의 이론에 대해 양 쪽 다 플레이어에게 소개한 후에 플레이어는 어느 쪽의 입장이 옳은 것 같냐고 질문하는 모양새다. 오스카 와일드와 칸트 등에 영향을 받은 절대적 미를 '강한 신'으로, 스피노자나 대중 예술의 영향을 받은 상대적 미를 '약한 신'으로 표현하고 이 둘의 체현자를 미사쿠라 린과 쿠사나기 나오야로 지정하고 대립시켰다. 특히 나오야는 에밀리 디킨슨의 시를 두 개나 인용해 가면서 설명하는데, 이는 따로 설명해 둔 글이 있으니 참고하면 좋을 것이다.
다만 작품 전체적인 인상면에서는 아무래도 상대주의 쪽으로 무게를 옮겨 둔 모양새다. 사실 오늘날 현대인들, 나아가 현대 예술가 중에서 관객의 중요함을 무시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특히나 게임을 플레이하고 있는 플레이어 역시도 이런 상대주의의 손을 들어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보니 배치한 밸런스인 것 같다.
“나오 군이 모르니까 그래서 케이 군이 그런 작품을 만들어냈어야 했어. 나는 그 마음이 잘 이해돼…. 제비가 사랑한 것이 동상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랬더라면 추위 속에서도 함께 있을 수 있었을 텐데…. 설령 그 끝이 죽음이라고 해도. 살을 에는 추위에 몸이 얼어붙을 수도 있지만, 같이 있을 수만 있다면 충분히 따뜻해. 제비가 남쪽 나라로 날아갈 이유는 없었어….”
“제비는 남쪽으로 가야지. 케이도, 그리고 너도. 그거면 됐어. 계절은 다시 돌고 돌아, 돌아와야 할 땅이 있으니까.”
“돌아와야 할 땅?”
“아무리 높게 날아도 날개는 언젠가 힘을 다해. 그러니까 날개에는 돌아갈 땅이 필요해.”
“나랑 케이 군이?”
“그래, 너랑 케이가. 케이는 머나먼 곳으로 날아갔지만, 그래도 돌아올 땅은 여기 있어. 린, 너도 마찬 가지고. 계절은 돌아오고…… 그리고 다시 내려앉으면 돼.”
“그건 몇 번이라도요?”
“그래. 계절은 계속해서 돌아와.”
또한 행복한 왕자가 이 작품의 모티프라고 설명하는 장면도 나온다. 쿠사나기 나오야는 '왕자'에 해당하는 캐릭터고, 나츠메 케이와 미사쿠라 린은 '제비'에 해당하는 캐릭터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여기에서 나오야와 린의 인식차이가 드러난다. 린은 케이와 자신이 왕자인 나오야를 떠나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을 표현하지만, 나오야는 제비는 왕자를 떠나야 하며 단지 왕자는 그런 제비가 돌아 올 쉼터가 될 수 있다고 표현한다.
이게 원작 <행복한 왕자>와 스카지의 해석의 차이다. 기본적으로 스카지는 작품에서 모티프는 따오지만 결정적인 주제는 다르게 표현하는 것을 좋아하는 데, 행복한 왕자 역시 마찬가지다. 나오야는 왕자와 마찬가지로 모든 것을 내어주는 영웅적 존재이고, 린과 케이는 그런 나오야를 사랑하여 곁에 있고 싶어 하는 존재다. 하지만 <행복한 왕자>와 다른 것은 쿠사나기 나오야는 많은 걸 내어준 존재이지만 결코 쓰러지지는 않았다는 것이고, 이 왕자가 진정으로 위하고자 하는 것은 모두가 아니라 자기 주변에 있는 사람들. 제비를 위하고자 한다는 사실이다. 그렇기 위해 나오야는 모두가 돌아올 곳이 되는 것을 목표로 한 것이다.
6장 벚나무 숲 아래를 거닐다
6장은 앞선 이야기와 달리 유미하리 학원, 대학을 졸업한 이후 유미하리 학원에 교사로 부임한 쿠사나기 나오야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여기에서 묘사되는 쿠사나기 나오야는 유미하리 학원 시절의 '히어로'가 아니라 모든 것을 내어주고 남은 '행복한 왕자'의 모습을 체현하고 있다. 그리고 후반부에는 <벚꽃의 발자국>을 신생 유미하리 미술부와 함께 다시 만들어내면서 다시 일어서는 쿠사나기 나오야의 모습을 그려낸다.
6장은 사실 <사쿠라의 시>의 내용이라기보다는, <사쿠라의 각>의 프롤로그에 가까운 존재다. 특히 후반부의 쿠사나기 나오야 vs 나카야마 카나의 장면과 곧바로 이어지는 미사쿠라 린의 코멘트는 사쿠라의 각이 이번 작품 5장~6장에서 다뤘던 것처럼 세 가지 미학의 대립을 그려낸다는 것을 예고한다. 유미주의와 상대주의, 그리고 포스트 모더니즘의 대립이 아마도 사쿠라의 각의 메인 테마로 예상된다.
앞으로 나아가는 힘이 크게 후퇴시킬 때도 있다….
진화가 방황을 낳을 수도 있다….
하지만…. 방황도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힘이 될 수 있다.
쿠사나기 나오야는 과거 미사쿠라 린에게 말했듯, 자신은 제비가 돌아올 수 있는 왕자가 될 준비를 마쳤다. 나오야는 케이와 함께 미래로 나아가려 하다가 케이의 죽음을 통해 방황했다. 하지만 그 방황을 끝내고 난 나오야는 다시 앞으로 나아갈 준비를 마친 것이다.
그 외에도 2가지 핵심 주제를 내포하고 있다. 하나는 행복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예술과 행복은 어떤 관계인가이다.
“후후 그렇지 과음했으니 당연하겠네.”
“하지만 똑같아.”
“똑같아? 뭐가 똑같아?”
“산다는 게. 뭐든지 과하면 토악질이 나올 정도로 속이 더부룩해져. 그게 최고로 눈부시게 빛나면서 최고로 행복한 것이더라도, 과하면 피를 토할 정도로 토하고 싶어 져. 최고로 빛나는 순간도 정도가 지나치면 고통에 불과해. 도가 지나치면 뭐든 똑같아.”
“그렇지 도가 지나치면 쾌락은 고통이 돼. 뭐든 그래. 하지만 넌 술에 떡이 될 만큼 마셨잖아.”
“그래, 그렇지.”
“왜 속이 불편해질 걸 알면서 술을 그렇게 마셨어?”
“당연히 인간이 행복을 바라는 것과 같은 이치지. 행복도 술과 마찬가지라, 도가 지나치면 토하고 싶어져. 그런 개 같은 게 행복인데…… 그런데 사람은 행복을 추구해. 허용량 이상의 행복은 인간에게 구토에 불과하지만, 그래도 그 행복을 손에 넣고자 해. 삼키려고 해. 하지만 인간은 도가 넘은 행복을 견딜 수 없어. 행복을 견디지 못하고 속이 울렁거려서 화장실에서 전부 내뱉고 말지. 그런 풍경이 주말이 되면 온갖 술집에서 보여. 흔한 일들이지. 인간에게 지나친 행복은 고통에 불과하고, 또한 고통 자체도 행복이란 동전의 뒷면에 불과해. 불행이란 고통은 행복의 뒷면에 불과하다고. 불행 역시 행복의 다른 풍경에 불과해.”
“나오야, 넌 행복해?”
“그래서 괴로워하겠지? 진짜로 불행한 놈은 이런 표정 안 지어.”
첫 번째 핵심 주제는 <행복>이다. 전작 <멋진 나날들>에서 이야기하고자 했던 테마의 변주인 것이다. 이를 쿠사나기 나오야는 다양한 형태로 설명한다. '행복'을 술에 비유하여 행복과 불행, 쾌락과 고통은 표리일체이고 사실은 하나라는 것을 직접적으로 설명한다. 사실 이 부분은 좀 아쉬운데, 이야기로 주제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캐릭터의 입을 빌려 직접적으로 말하는 것으로 주제를 표현했다는 것은 분명히 아쉬운 부분이다.
나는 어제 말했어.
예술은, 보는 사람을 통해 다시 재생되어야 해.
보는 사람을 통해 다시 살아나기 때문에, 예술에 의미가 있다고.
기자들 앞에서 한 말이야. 그런데 작품을 다 만들고서 확신이 들었던 거겠지.
미는 보는 사람에 의해서 다시 발견된다.
미는 보는 사람에 의해서 부활한다.
그때 신이 있었어.
그래, 린 말이 맞아. 약한 신이야.
하지만 인간이 미와 마주했을 때 어쩌면 감동했을 때, 어쩌면 결심했을 때, 그리고 어쩌면 사랑했을 때. 그 약한 신은 사람 곁에 있어. 사람과 함께하는 신은 약한 신이지만, 그래도 사람이 믿을 때 곁에 있어.
예술 작품은 영원의 상 아래에서 본 대상이다.
그리고 좋은 삶이란 영원의 상 아래에서 본 세계이다.
여기에 예술과 윤리의 관계가 존재한다.
영원의 상을 보증하는 데에 절대적인 신은 필요 없다.
사람은 사람을 위해 신을 느끼고 그리고 감동하면 된다.
약한 신은 연약한 인간들의 미 속에 있어.
그래서 그 약한 신은 의의가 있어.
그러니 난 말할 거야. 자, 팔 벌려 받아들여라.
이 그림에 깃든 신은 영원한 상이다.
이 감동은 순간이지만 영원하다.
그리고 그곳에 행복이 있다….
약한 신과 함께 있을 때만 행복을 느낄 수 있지.
왜냐면 강한 행복은 강한 술과 마찬가지로.
인간을 취하게 만드니까.
두 번째 핵심 주제가 바로 예술과 행복이다. 사실 이것이 '사쿠라의 시'가 궁극적으로 표현해내고 싶었던 이야기인 것 같은데, 이것을 설명하기 위한 부연 설명들이 바로 지난 루트들의 이야기였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분량 상 제대로 담아내기는 어려웠고, 그래서 후속작인 '사쿠라의 각'이 필연적으로 등장한다. 즉, 사쿠라의 시는 단일 작품으로는 미완성인 작품이다.
쿠사나기 켄이치로의 의지를 잇고, 케이의 죽음을 극복한 쿠사나기 나오야는 진정한 의미에서 예술의 가치와 행복에 대해 깨닫고 위와 같이 논평한다. 과한 행복은 고통과 불행을 만들어 내고, 절대적인 미의 추구는 결국 인간이 걸어야 하는 길을 벗어나는 일이라고 했던 아버지의 말을 완전히 깨닫는다. 그리고 린이 다시 돌아올 수 있는 장소가 되는 것을 추구한다.
챕터 내에서 마음에 들었던 부분은 의외로 교사가 잘 어울리는 나오야의 모습이다. 사쿠라의 각에서는 아마 교사로 활동하게 될 텐데, 마음에 드는 모습을 더 많이 볼 수 있어서 좋을 것 같다.
총평 벚꽃의 시
그것이 허무하다면 허무 자체가 그러하니 어느 정도는 모두에게 공통될 것입니다.
(모든 것이 내 안의 모두이듯이, 모두가 각자 속의 전부니까요.)
여기까지 이야기했다면 이제 글의 서두에서 했던 질문의 답변을 할 수 있겠다. 왜 이 작품은 봄과 아수라 서를 인용하며 작품을 시작했을까? 이는 이 작품이 강조하는 것이 바로 인과 교류이기 때문이다. 예술은 홀로 존재할 수 없고 보는 것을 통해서 완성된다. 나아가 인간의 삶 역시 그렇다. 미야자와 겐지가 강조했던 공동체 사회의 중요성과 같은 맥락이다.
자신 안에 모두가 있듯, 모두 안에도 내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존재는 어느 정도 공통된 것이며 그렇기에 서로를 이해할 수 있다. 그렇기에 홀로 서는 것보다 서로 어우러지는, 인과 교류의 삶을 살아야 한다. '사쿠라의 시'에서 가장 강조했던 쿠사나기 나오야의 삶을 드러내고자 이를 인용했던 것이다.
전체적으로 매력적인 테마와 이를 잘 풀어낸 이야기가 매력적인 작품이지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은 한 작품에서 너무 많은 것을 해내려고 하다 보니 다소 산만해진 면이 있다는 점이다. 특히 전작 <멋진 나날들>이 다양한 소재를 사용했지만 핵심 주제가 단 하나였기 때문에 이야기가 아름답게 구성되었다는 점을 떠올려보면 크게 아쉬운 부분이다.
하지만 그 단점을 상회할 만큼 매력적인 이야기와 주제가 담겨 있으며, 그리고 아직 이 작품은 완성된 것이 아니라 조만간 후속작이 발매된다는 것이 또한 기대할만한 부분이다. 사쿠라의 시 안에서 다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얼마나 매끄럽게 완성해 냈을지 기대된다.
<벚꽃의 시>는 작품의 제목이기도 하며, 오프닝 테마기도한데 사실 이 작품의 핵심은 이 곡에 있다. 이 작품이 표현하고자 하는 모든 내용이 이 곡 하나에 담겨 있다고 해도 무방하다. 그래서 처음에는 곡의 해석을 통해 작품을 리뷰하려고 했었는데,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져서 원래 글은 대충 저장해 두고 새로 작성했다. 이는 다음에 할 일로 미뤄야겠다. 사실 이 작품에 관해서는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다. 사쿠라의 각을 마치면 한번 잔잔히 정리해 봐야겠다.
벚꽃의 시가 어렴풋이 들리는 것 같다.

벚꽃은 아직 봉오리였다.
봄은 저 앞으로 다가왔지만, 아직 살짝 남았다.
유메노우키자카를 둘이서 내려간다.
유미하리 시내가 한눈에 보인다.
해는 아직 높았다.
하지만 얼마 지나면 해도 지겠지.
그러면 이 거리에도 불이 켜진다.
유미하리의 야경은 흩날린 벚꽃처럼 아릅답다.
아마도 그 꽃잎 하나하나, 등불 하나하나에,
사람들의 생활이 담겨 있기 때문이리라.
꽃잎은 한 장도 아름답다.
하지만 수없이 많은 꽃잎에 둘러싸인 모습이 더욱 아름답다.
사람들의 인과적 교류등.
한없이 많은 사람들의 인과가 빛을 밝힌다.
우리 집도 그 빛 중 하나다.
나츠메 저택.
그 저택에선 여러 일이 일어났었다.
한없이 많은 추억들.
좋은 것도, 나쁜 것도.
모두가 그곳에 담겨 있다.
그래서 우리는 그곳에 돌아간다.
나는 멈춰 선 것이 아니다.
걷지 않았던 것이 아니다.
여기서, 이곳에서, 나는 내 삶을 걸어간다.
그런 생각을 하며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으니
‘우리는 이렇게 걷고 있잖아’라고 아이가 말했다.
이제부턴 둘이 함께 걷자.
천천히, 둘이서.
한없이, 한없이 이어지는 길.
우리는 그런 길을 천천히 걸어갔다.
그런 나를 보고, 아이가 방긋 웃었다.
벚꽃의 시가 어렴풋이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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