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법사의 밤 (魔法使いの夜)
발매 연기를 몇 번이나 거듭하고 세상의 빛을 본 작품이다. 대개 발매 연기를 하고 나오는 작품들은 성과가 썩 좋지 않다. 왜냐면 발매 연기를 하면 유저들의 불만과 더불어 기대치까지 올라가버리기 때문이다. 특히나 연단위로 발매 연기가 되는 경우엔 더더욱 그렇다. 그렇기 때문에 긴 발매 연기를 거친 후 나오는 작품은 웬만큼 만들어도 까이기 십상이다. '그렇게 연기하고 이 정도?'라는 평가를 받기 때문. 지금까지 야겜을 해오면서 이렇게 발매 연기를 하고 정말 연기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게끔 만든 작품은 이걸로 딱 두 번째다. 첫 번째는 클라나드. 두 번째는 마법사의 밤. '최신의 마법사'를 다루고 있는 작품인 만큼 '최신의 타입문'이 무엇인지 보여준 것 같다.
먼저 이 작품을 고평 가하는 가장 결정적인 이유에 대해 이야기하자. 사실 비주얼 노벨이라는 장르는 최근에 와서는 거의 쓰이지 않는다. 에로게 판도도 거의 대부분 어드벤처로 돌아가니까. 음악, 글, 스탠딩 CG, CG로 이루어져 있다. 이펙트 효과는 거의 보기도 힘들다. 시나리오상의 연출 기법은 사용해도 매체의 연출 기법을 사용하는 작품은 거의 없는 게 현실이다. 반면 내가 처음 비주얼 노벨을 만났을 때는 굉장히 충격적이었다. 왜냐면, 내가 생각하던 가장 이상적인 이야기 전달 매체였기 때문이다. 글이 주는 상상력과, 그림이 주는 시각적 효과, 그리고 음악이 만들어내는 분위기. 얼핏 영상과 흡사하지만, 가만히 있어도 흘러가는 영상과는 조금 다른 그런 매체. 하지만 뭐, 그런 나의 감정과는 반대로 몰락해버렸지만.
그로부터 몇 년 후, 누구보다도 비주얼 노벨의 특성을 극한까지 살려낸 작품이 나왔다. 바로 <마법사의 밤>이다. 이 작품은 비주얼 노벨이 보여줄 수 있는 거의 모든 장점을 끌어낸 작품이다. 이야기를 떠나서 말이다. 비주얼 노벨이라는 건 글로만 성립하는 것이 아니다. 그림과 음악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것이 연출이다. 이 세 가지를 하나로 묶는, 그리고 그것을 작품으로 승화시키는 연결고리. 바로 마법사의 밤은 이러한 '비주얼 노벨의 연출'을 극대화한 작품이다.
나스의 인터뷰를 보면 이런 대목이 나온다. 이 작품을 플레이한 동업자가 '이 작품은 영상화할 필요가 없는 작품'이라고. 보면서 감탄했다. 아주 적확한 표현이었으니까. 플레이해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이 작품은 정적인 이야기를 가진 동적인 작품이다. 글 이외의 모든 것이 가만히 있는 법이 없다. 심지어 배경을 보면 깜짝 놀랄 때가 있다. 배경과 스탠딩 CG를 적당히 오려 붙여 CG인 것처럼 보이게끔 하는 것부터 CG들 오려 붙여서 또 하나의 CG를 만들어내는 것까지. 거기다가 이펙트 효과를 아주 잘 살려서 마치 영상을 보는 듯 한 착각마저 불러일으킨다. 이러한 특성을 가장 잘 살린 것이 바로 5장의 마법사의 밤 2 챕터. 이야기가 가장 고조되는 순간, 그 이야기를 무엇보다도 멋있고 아름답고, 그리고 역동적이게 가장 잘 표현한 부분이다. 이 부분은 사실 직접 봐야 안다. 또 하나 더 꼽자면 '청(Five)'의 발동 순간. 그 부분 연출도 끝내줬다. 글도, 그림도, 음악도 그리고 영상에서도 맛볼 수 없는. 오직 비주얼 노벨에서만 느낄 수 있는 그런 매력을 정말 잘 표현한 작품.
<공의 경계> 감상에서 앞서 이야기했듯 공의 경계는 기존 월희와 페이트에서 보여주었던 문장과는 상당히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다. (물론 공의 경계가 이전 작이긴 하지만, 원래 모습이 이거라니.) 그리고 그 문장이 마법사의 밤에 와서 한번 더 발전시켜서 거의 완성형에 다다른 것 같다. 인터뷰에서 '게임'이라는 엔터테인먼트에 부합하게 문장을 바꾼 것이 월희와 페이트라고 했지만, 자신의 생각을 바꾼 것인지 마법사의 밤의 문장은 공의 경계에 가깝다. 후반부에 살짝 폭주하긴 하지만 전반적으로 정말 차분한 문장을 보여주고 있다. 거의 내 취향 기준으로는 완성형에 다가가고 있지 않나 싶다.
아무리 연출이 우수하더라도 근간인 시나리오가 엉망이면 재밌다곤 이야기하기 힘들다. 하지만 마법사의 밤은 재미도 있었다. 사실 5장 마법사의 밤 전까지는 차분한 문장에 정적인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어서 지루하다는 인상을 받기 쉽지만, 5장을 들어가는 순간부터 그러한 생각이 들지 않는다. 전형적인 슬로 스타터(Slow Starter). 아마 리타이어 한다면 이 부분이 가장 많지 않을까 싶다. 이것 이후부터는 굉장히 즐겁게 플레이했다. 특히 이 작품의 핵이라고 생각하기 쉬운 '배틀' 파트보다도 훨씬 재밌었던 것은 일상 + 로맨스 파트. 나스 이 양반 공의 경계에서도 굉장히 감각적인 거리감을 보여주더니 마법사의 밤에서 또 한번 보여주더라. 주요 뷰 포인트는 아리스의 심경 변화와 아오코 표정. 스탠딩 CG를 아주 제대로 살렸다.
그리고 마지막 엔딩 부분과 에필로그 부분도. 산에서 내려와서 시작한 이야기가 산에서 내려가는 것으로 끝낸다는 것도 굉장히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첫 번째와는 달리, 두 번째는 분명한 성장과 결단이 있었다는 점도. 등장하는 주연은 모두 성장을 이뤘다는 점 역시. 그리고 이때 표현한 두 사람의 거리감도 몹시 좋았다. 강렬히 당기지도, 너무 멀지도 않은.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서로의 존재가 서로를 긍정하는 모습. '연애'를 메인 소재로 앞세운 웬만한 에로게는 다 씹어먹을 정도로 로맨스의 두근거림을 잘 살린 부분이 아닌가 싶다. 사실 이렇게 애타게 만드는 미소녀 게임, 근 몇 년간은 본 적 없다. 배틀 파트보다 오히려 이쪽을 더 높게 쳐야 하는 거 아닌지.
좀 아쉬운 점은, 이렇게 매력적인 히로인들을 1부에서 '완성' 시켜놓고 끝내버렸다는 점. 감칠맛 나게... 너무 애태우는 거 아닌지. 2부 나온다면 생각도 안 하고 그냥 바로 예약하는 것으로. 정말 분량만 제외한다면 전반적으로 퍼펙트 한 만족도였다. 그래 분량.. 분량....
마법사의 밤은 총 3부작으로 이번 작품은 1부작에 해당하는 작품이라고 인터뷰에서 밝혔다. 아마 다음 타입문의 작품은 월희 리메이크가 될 확률이 몹시 높지만, 마법사의 밤도 몹시 기대된다. 처음 비주얼 노벨을 만났을 때의 두근거림을 다시 느끼는 것 같다. 살다 살다 나스의 작품을 칭찬도 아니고 칭송(?) 하는 날이 올 줄은 몰랐다. 5년 전의 내가 지금의 나를 보면 까무러칠 듯.. 여하튼, 굉장히 만족스러운 작품이었다.
모든 것을 받아들이면서도,
실제로는 아무것도 손에 넣지 못한 인간이 있고,
모든 것을 버려 온 듯하면서도,
실제로는, 어느 것 하나 잃지 않은 소녀가 있었다.
……아직 누구와도 만나지 않았던 비 오는 날의 회의실.
스스로의 추함과,
정반대의 고귀함을 보았다.
모르겠어 소쥬로?
살아가는데 있어 가장 첫번째인 관객은 말이지,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이야.
그러니까 인생이란 건 방심할 수 없는 거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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