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타인즈 게이트 제로 (Steins;Gate 0)
타임 리프계 마스터 피스로 칭송받는 <슈타인즈 게이트>의 정식 후속작 <슈타인즈 게이트 제로>. 전작 트루 엔딩인 경계면상의 슈타인즈 게이트로 이어지는 결정적인 힌트를 제공한 '베타 세계선 미래의 오카베 린타로'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전작에서 이 부분을 말끔히 설명하지 않고 넘어갔던터라 이 에피소드를 궁금해하는 플레이어도 꽤 많았고, 슈타인즈 게이트의 인기가 애니메이션화를 거치면서 더욱 증폭된 터라 이 기회에 한 번 만들어보자는 생각으로 나온 작품이었던 것 같다.
발매한지는 약 1년이 넘었지만, 비타 자체에 손이 너무 안 가서 이제야 플레이했는데 플레이해보니 정말 재미있어서 이럴 거면 진작에 할 걸이라는 후회가 남았던 작품. 발매 당시에 플레이했으면 좀 더 흐름을 탈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다만 세간의 평은 전작으로 인한 기대감인지, 아니면 다소 맥빠지는 결말 때문인지는 몰라도 평이 아주 좋은 편은(3.5~4/5점) 아니다.
원작(게임)과 설정 부분에서 세세하게 충돌하는 부분이 있는데, 이는 슈타인즈 게이트의 제로가 원작을 게임 기준이 아닌 5pb판 소설 기준을 삼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좀 더 제대로 즐길 플레이어라면 소설판을 먼저 읽어 본 다음 플레이하는 것을 추천한다.
결과만 이야기하자면, 게임 자체는 굉장히 재미있었다. 단, 이것은 전작인 '슈타인즈 게이트'를 제외하고 생각했을 때. 아무래도 슈타인즈 게이트를 의식하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제로는 약간 빛이 바래는 감이 있다. 그 이유는 이 작품이 전작과 어느 정도 충돌하는 면이 있고, 전작과 이미지가 좀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전작을 너무 즐겁게 플레이하면 할수록, 전작을 의식하면 할수록 제로에 대한 평가가 떨어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먼저 전작의 경우 목표의식이 명확(시이나 마유리를 구한다) 했고, 그것을 향해 맹돌진하는 감정이입이 매우 간단한 작품이었지만 제로의 경우 그렇지 않다. 제로에서 오카베 린타로는 엔딩까지 계속 방황한다. 구하지 못 했던 마키세 크리스에 대한 미련, 언제 닥칠지 모르는 세계 제3차 대전에 대한 공포, 현실화 되어가는 라보멤의 위기로 인해 오카베 린타로는 방황한 채 외부의 개입으로만 이야기가 진행된다. 이 부분이 바로 원작과의 가장 큰 다른 점. 주인공이 사건을 헤쳐나가는 능동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닥쳐오는 사건을 회피하려는 수동적인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에 플레이어가 답답함을 느끼기 쉽다.
이로 인한 결과로 주인공인 오카베 린타로의 매력이 떨어지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 전작의 오카베 린타로는 어떤 역경에도, 무릎 꿇어버릴 것 같은 상황에서도 기어코 다시 일어나는 그런 캐릭터였지만 베타 세계선의 오카베 린타로는 이미 모든 것을 포기한 인물이기에 발을 내딛지도, 그렇다고 멈춰 설 수도 없는 그런 어중간한 인물이 되었다. 물론 개인적으론 이런 자기모순을 안고 있는 캐릭터를 몹시 사랑하기 때문에 베타 세계선의 오카베 린타로도 좋았지만 대중적으론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전작인 슈타인즈 게이트는 '오카베 린타로의 이야기'였지만, 이번 슈타인즈 게이트 제로는 '모두의 이야기'가 되었다. 난 이점이 몹시 사랑스럽다고 생각한다. 이전 세계선에서 라보멤은 오카베를 빛내기 위한 조력자에 지나지 않았지만, 이번 제로는 라보멤 하나하나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이야기는 진행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단 한 명을 위한 이야기가 아닌 모두를 위한 이야기가 될 수 있었다는 점을 떠올린다면 오히려 더 좋은 방향이 아닐까 생각하기도 한다. 물론 대중이 기대한 슈타인즈 게이트는 '오카베 린타로의 이야기'였기 때문에 오히려 마이너스로 작용한 것 같지만.
그리고 전작의 또 하나의 주인공이라고 부를 수 있었던 히로인 마키세 크리스의 비중이 한없이 줄었다는 점도 인기 감소에 한몫하는 듯하다. 일본 쪽 감상평을 봐도 '크리스가 비중이 적다'라는 말이 자주 언급되는 것을 봐선 슈타인즈 게이트의 인기에는 역시 마키세 크리스의 지분이 상당히 크긴 큰 듯. 다만 개인적으론 마호라는 크리스만큼 매력적인 또 하나의 주인공이 등장했기 때문에 이 부분은 크게 괘념치 않았다.
또한 작중 많은 떡밥이 해소되지 않은 채로 끝났다는 것도 아쉬운 부분. 리딩 슈타이너를 가진 인물이 전 세계에 다수 드러났다는 점이나, 스트레토포에 관한 이야기 등 상당수의 떡밥이 다 묻혀버리고 말았다. 이는 또 다른 외전을 위한 포석인지 아니면 그냥 이야기 전개에 흥을 넣기 위해 도입한 임시 설정인지는 알 수 없으나 분명 아쉬운 부분.
마지막 아쉬운 점은 역시 가장 결정적이라고 부를 수 있었던 '결말'부분. 아무래도 원작의 경계면상의 슈타인즈 게이트 엔딩으로 이어지는 그 간극을 메꾸기 위한 작품이다 보니 이 작품엔 제대로 부를 수 있는 '결말'이 없다. 맹약의 리나시멘토와 무한원점의 알타이르를 제외하면 캐릭터 엔딩도 아닌 단순한 배드 엔딩이고, 이 둘 역시 작품 하나가 주는 카타르시스를 제대로 느끼기는 힘들다. 트루 엔딩인 교차좌표의 스타더스트는 더 심각한데, 끝내고 나면 '이게 끝이야?'라는 생각이 절로 들 수밖에 없는 상당히 맥빠지는 엔딩. 모든 클라이맥스와 카타르시스를 본편에 헌사하는 구성이라 제로 자체가 주는 쾌감이 거의 없다시피한 점은 치명적인 결점이다. 아마 대부분의 미묘한 평은 이 결말에서 오지 않았을까.
허나 이런 결점에도 불구하고 난 작품 자체는 재미있었다. 특히 '게임'이라는 점을 정말 극한까지 살린 구성이 매력적이었는데, 소설이라면 상당히 맥빠질 구성이었지만 게임이었기 때문에 의미 있는 '세계선' 구성이었다. 이 세계선만큼은 정말 멀티 엔딩이 가능한 게임이기 때문에 빛을 발할 수 있는 설정이 아닐까 싶다. 소설이었다면 이만큼 살려내지 못 했을 것.
전작과 같은 카타르시스를 기대하기보다는 이야기에 끌려다닌다는 느낌을 주는 점이 아쉽지만 이야기 자체는 꽤 매력적이다.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이야기와 끝없는 오카베 린타로의 갈등. 그리고 그런 오카베 린타로를 일으켜 세우기 위한 동료들의 노력. 그리고 마침내 부활하는 오카베 린타로까지, 플롯 자체는 탄탄하다.
게다가 제대로 다뤄지지는 않았지만 디스토피아가 된 세계관을 직접 보는 것으로 인해 작품 내의 독기가 전작에 비해 제법 올라갔다는 점도 꽤 인상적. 동시에 아쉬움도 좀 남는 게 사실 모두가 기대한 슈타인즈 게이트 제로는 그 디스토피아가 된 세계선에서 고군분투하는 오카베 린타로의 모습이었겠지만, 그 이야기는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이 아쉬움 중 하나일까.
종합하자면 전작인 슈타인즈 게이트를 넘어서진 못하지만, 전작의 명성을 해칠 정도는 아닌 작품. 개인적으론 제로도 제로 나름대로 마음에 들었다. 다만 전작과 동등한 기준을 갖고 바라본다면 아마 제로는 다소 실망할만한 여지가 있는 작품이 아닐까. 어느 정도 기대감을 내려놓고 플레이하기를 권한다.
그래, 이건 영원의 이별이 아니야.
또 만나자…….
그래서 작별 인사는 하지 않겠어.
언젠가 너와 만날 그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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