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진 나날들 ~불연속 존재~ HD (素晴らしき日々 ~不連続存在~ HD, 2017)
Tell them I've had a wonderful life
멋진 삶을 살았노라고 사람들에게 이야기해 주시오.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
평생을 자살 충동 속에서 살아왔던 대철학자의 유언이다. 그는 무슨 심정으로 이러한 유언을 남겼던 것일까?
이 작품은 바로 이 대철학자,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의 유언과 저작 <논리철학논고>에서 출발한다. 시나리오 라이터 SCA-自(이하 스카지)가 <논리철학논고>를 읽고 생각한 감상 그 자체를 새로운 작품으로 만들어낸 것이다. 그것도 두 번을. 첫번째는 <종말의 하늘(終ノ空)>, 그리고 두번째가 바로 본 작 <멋진 나날들(素晴らしき日々)>이다. 감상문을 두 번 작성한데는 의미가 있다. <멋진 나날들>은 앞서 제작된 작품 <종말의 하늘>과 결별하기 위해 제작된 작품이다. 그렇기 때문에 본 작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먼저 종말의 하늘의 이야기를 조금 해야한다.
─먼저 본 작품의 기획이 나온 경위부터 가르쳐주세요.
본작의 기획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것은 처녀작 <종말의 하늘>과 결별하는 것에 있습니다. 그 게임은 지금와서 보자면 부족한 부분이 있습니다만, 제가 제일 표현하고 싶었던 것이 그려져 있죠. 그것이 뭐냐면 세상엔 아무것도 신용할 수 없다는 '회의주의'와 '연애의 부정'이군요.
─미소녀 게임에선 있을 수 없는 컨셉이네요 (웃음)
당시엔 좀 그렇죠 (웃음). 그런데도 용케 좋게도, 나쁘게도 일정 수준 이상의 평가를 받았습니다만 발매로부터 10년이 지난 현재에도 스카지=종말의 하늘처럼 다들 말씀하시죠. 그렇지만 제 자신은 요 몇년간 미소녀 게임에 대한 사고방식이 변해서 오히려 지금까지 눈을 돌리고 있던 '연애'라는 행위에 정면으로 마주하고 싶었습니다. 그런 생각으로 <사쿠라의 시>를 집필하고 있었습니다만 어쩌면 제가 사랑의 이야기를 쓰면 종말의 하늘의 팬으로부터는 배신처럼 여겨질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사쿠라의 시>를 쓰기 전에, 먼저 이번 작품으로 <종말의 하늘>의 흐름을 한 번 끊고 새로운 제 스타일을 보여주고 싶다, 거기에서 <종말의 하늘>의 설정을 베이스로 무대를 현대로 바꾼 현대판 <종말의 하늘>이라고 말할 수 있는 본 작품의 제작을 시작했습니다.
─결별이라고 말씀하셨는데, 굳이 같은 소재를 선택하셨네요?
소재는 같습니다만, 내용은 완전히 다릅니다. 예를 들어 <종말의 하늘>에서 많이 사용한 철학 용어 등은 상당히 배제하고 흔한 일상을 메인으로 그린다던지 말이죠. 그런 부분을 통해 지금의 제 스탠스를 좀 더 알아봐 주실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TECHGIAN 2019년 6월호 발췌
<종말의 하늘>은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의 저서 <논리철학논고>에 등장하는 구절에서 출발한다.
5.6 나의 언어의 한계는 나의 세계의 한계를 뜻한다
7.0 말할 수 없는 것에는 침묵해야 한다.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 - <논리철학논고>
<종말의 하늘>이라는 작품은, 저 구절들이 의미하는 바를 그대로 작품으로 표현해낸 것이다.
1999년 7월,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으로 종말론이 유행하던 시기를 배경으로 하는 <종말의 하늘>은 특유의 불안하고 기괴한 연출과 일러스트로 종말을 앞둔 4명의 소년 소녀들의 이야기를 그린 군상극이다. 이 작품의 테마는 바로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논고>에서 등장한 실재론, 세계의 한계이다. 동일한 사건을 네 명의 시각으로 바라보면서, 같은 사안에 대해 보는 시야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는 것을 보이며 각각이 바라보는 '세계의 한계'에 대해 이야기하는 작품이다.
1장의 미나카미 유키토가 바라보는 '종말의 하늘'은 지극히 평범한데, 4장의 마미야 타쿠지가 바라보는 '종말의 하늘'은 몹시 기괴하다. 하지만 마미야 타쿠지의 입장에선, 그 모습이 자신의 세계다. 세계의 원형이 존재 한다고 하더라도, 내가 바라보는 세계가 그런 형태라면 세계는 그런 존재인 것이다. 이는 세계란, 그 사람의 지각으로 구성됨을 의미한다.
「뭐야 그게……이해가 잘 안 되는데……아, 아야나 씨 뭔가 아는 거야……?」
「당신이 알고 있는 일 밖에는 몰라……」
「내가 알고 있는 일?」
「응……당신의 한계가 세계의 한계……그러니 당신이 말할 수 없는 것……당신이 볼 수 없는 것을 당신에게 가르칠 수가 없고 보여주는 것도 할 수 없어……」
「어, 어째서?」
「말할 수 있는 건 뻔해…… 당신이 본 광경……밖에 보이지 않는다는 것」
멋진 나날들 - Down the rabbit-Hole II, 미나카미 유키 & 오토나시 아야나
그 사람이 바라보고 지각하고 언어로 구현화할 수 있는 세계가 그 사람에게 있어 세계이며, 모든 사람에게 절대적으로 존재하는 세계는 우리가 정의할 수 없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실재, 혹은 세계 그 너머는 명확하지 않고 언어로 나타낼 수 없으므로 말할 수 없는 것에 해당한다. '말할 수 없는 것에는 침묵해야 한다.'
즉 이 작품을 통해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하고자 했던 것이라고 추측한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다. <종말의 하늘>에는 주제는 있지만 플레이어의 행동을 변화하게 만드는 메시지는 없다. 그저 끝없는 회의주의만 있을 뿐이다. 그것이 1999년의 스카지였다. 그리고 그 작품과 테마는 시대상과 맞물려 일부에서 컬트적인 인기를 얻었지만 시대는 변화하고 스카지 역시 변화했다. 그리하여 2010년의 스카지가 새롭게 쓴 <종말의 하늘>이 바로 <멋진 나날들>이다.
기본적으로 <멋진 나날들>은 <종말의 하늘>과 소재와 플롯이 유사하다. 하지만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바로 <종말의 하늘>은 '세계의 한계', 즉 '말할 수 없는 것'과 '말할 수 있는 것'을 구분하는 데서 그쳤지만, <멋진 나날들>은 더 나아가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이야기한다.
1, 2, 3장은 말 그대로 <종말의 하늘>의 리메이크다. 각각 미나카미 유키, 마미야 타쿠지, 타카시마 자쿠로의 시각에서 바라보는 종말의 하늘을 그리고 있다. 그래서인지 이 부분은 전작과 분위기가 매우 흡사하다. 강도는 약해졌지만, 여전히 기괴한 연출과 스크립트. 알아 먹기 힘든 장광설. 거기다 전작에 비해 더 커진 볼륨으로 인해 더 견디기 어려운 이지메, 마약, 강간 등의 무거운 소재들. 이러한 요소들이 많은 플레이어들을 포기하게끔 만든다.
그러나 4장부터는 이야기가 반전된다. 본 작품의 2장은 전작처럼 '종말의 하늘'을 맞이하는데서 끝나지만, <멋진 나날들>은 4장 이후부터 그런 앞 부분의 이야기들을 부정하기 시작한다. 종말의 하늘의 상징인 마미야 타쿠지를 대척점에 서는 유우키 토모사네를 통해 부정한다. 이를 통해 <종말의 하늘>이라는 작품과 결별하는 것이다. 회의주의에 빠져 있던 과거의 스카지와, 그리고 과거의 작품 그리고 마미야 타쿠지와 말이다.
<종말의 하늘> 너머를 그리는 것은 바로 삶의 의의다. <종말의 하늘>의 테마 중 큰 축이었던 '말할 수 없는 것에는 침묵해야 한다'는 주장은 여기서 부정된다. 삶의 의의는 명백히 말할 수 없는 것에 해당한다. 이는 그 누구도 명확하게 확언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삶의 의의라는 중요한 주제는 작품 내에서 비트겐슈타인의 유언 속에 등장한 'Wonderful Life', 즉 '멋진 나날들'이라는 말로 표현된다.
「그래……그럼 타쿠지 군이 말하는 가치 있는 인생은 뭐야?」
「어?」
「그, 그건……크게 성공 할거야……내겐 아마도 숨겨진 뭔가가 있을 테니까……」
「그렇구나. 그게 가치 있는 인생?」
「그래, 크게 성공하면 돈이 많이 들어오고 뭐든 할 수 있어……돈이 있으면 뭐든지 할 수 있어」
「돈으로 사랑도 살 수 있어?」
「당연하지! 여자 따윈 모두 돈을 노리고 남자랑 사귀는 거니까!」
「그런가……그럼 기둥서방인 남자는?」
「그런 건 미남에게 한정된 말이라고!」
「그럼 가치 있는 인생은 돈이 있거나 미남이어야 하는 거구나……」
「그, 그래. 부자인데다가 미남이면 인생에 가치가 있어」
「하루만이라도 그렇게 되면 인생에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어?」
「하, 하루는 안 되지. 더 많아야해」
「왜 더 필요한 거야?」
「그, 그런 멋진 나날들이 하루로 끝나면 안 돼. 그런 나날은 영원히 이어지지 않음 안 돼!」
멋진 나날들 - It's my own Invention, 마미야 타쿠지 & 오토나시 아야나
작품 내에서 비중을 갖고 있는 캐릭터들은 모두 한 번씩 이 '멋진 나날들'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이를 통해 자연스럽게 플레이어에게 '멋진 나날들'이란 무엇인가?라는 의문을 심어준다.
이 작품은 총 6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작품이 다음 장으로 넘어갈 수 있는 조건이 재미있다. 바로 '멋진 나날들'을 찾는 것에 실패하는 것이다. 루트 분기상으로 배드 엔딩 취급 당하는 엔딩들은 모두 저마다 멋진 나날들을 찾는데 성공한 해피 엔딩이다. 즉, 멋진 나날들을 찾는 것, 행복해지는 것에 성공한 이야기들은 거기서 끝낼 수 있다는 이야기다. 멋지지 않은가? 실패를 거듭하더라도, 마지막엔 반드시 멋진 나날들을 찾아 행복하게 되는 것. 그것이 바로 이 작품의 구성이다. 배드 엔딩은 없다. 끝났다는 것은, 행복해졌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삶의 의의는 무엇인가? 멋진 나날들이란 무엇인가? 전작은 이것에 대해 대답할 수 없다고 결론 짓고, 무한한 회의주의에 잠겼지만 이 작품은 다르다. 종말의 하늘을 넘어서기 위해, 이것에 대한 대답을 내놓기 위해 태어난 것이 바로 작품 <멋진 나날들>이다.
'멋진 나날들'이 대체 무엇인지 쉽게 알 수 있는 부분은 바로 3장 자쿠로&키미카 엔드이다. 작중 자쿠로는 프롤로그와 3장 엔드를 제외하고는 모든 루트에서 비참한 죽음을 맞이한다. 그녀가 구원받을 수 있었던 멋진 나날들은 일종의 '꿈'이었던 프롤로그를 제외하면 3장 엔드 밖에 없다. 그렇다면 그녀가 멋진 나날들을 거머쥘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바로 '의지'다. 멋진 나날들에 이르는 길은 바로 의지다. 운명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닌, 삶의 주인이 자신임을 천명하는 것이다.
나 어쩌지……. 키미카를 내버려 둘 수도 없고, 혼자서 도망친다는 거 자체가 무리야…….
이대로는 그 시절로 돌아가게 돼…….
아니, 아니야. 이대로 모두에게 휩쓸리기만 하면 그 시절처럼 괴롭힘 당할 일은 없어.
모두가 바라는 행동을 해 주면 그 시절 같은 꼴은 당하지 않아…….
벌레처럼 깔보거나 밟아 뭉개거나 살해 당하거나 하진 않겠지.
하지만, 그건 벌레의 마음.
그 시절의 나. 벌레의 나날들……. 이대로면, 나는 벌레로 되돌아가게 돼.
또 벌레로 되돌아 갈 셈이야? 거울 안쪽의 세계에 우글우글 쌓인 벌레들…….
내가 아닌, 어딘가 머나먼 존재인 벌레들…….
하지만 실은 좀 달라. 거울 안쪽의 벌레는, 나.
아니, 거울 안쪽 같은 건 없어. 거울은 그저 내 모습을 비출 뿐……. 그건 내 모습.
거울에 비친 내 모습. 벌레의 마음. 나는 벌레. 벌레…….
하지만……. 나는……, 검객. 나는 시인. 나는 철학자…….
나는, 나는, 나는……나는 벌레가 아냐……. 나는 변한다…….
왜냐면…….
「쓸데없는 노력이 아냐!」
「어?」
「뭔 소리야?」
「잘 알고 있지. 그러나. 승산이 있을 때만 싸우는 것이 아니야……. 아무렴 패배를 알면서도 싸우는 게 한없이 아름다운 것이지.」
「뭐야 타카시마?」
「뭐야? 갑자기 혼잣말을, 병신같잖아……」
「우글우글 떼를 지어 다니는군……이런 녀석들을 전에도 본 적이 있지. 그래……, 이놈이고 저놈이고 나의 오래된 적들…….」
「우글우글 떼를 지어?」
「무, 뭐야 이 녀석?」
「이것은 허위라 불리는 망자! 어떠냐. 이거라도 받아보아라. 타협 편견 비겁 미련의 망자들아……. 뭣이? 화해라고? 이 내가? 아니, 전적으로 사양하겠다! 아아 네놈……거기 있는 건 어리석음의 망자로군!」
「진짜 재수 없으니까 그만하라고…….」
「뭐야 이 녀석…….」
「내가 쓰러진다는 것쯤은 이미 알고 있다……. 그게 어떻다는 거냐! 싸운다! 싸운다! 나는 싸우겠다!」
3장 Looking-glass Insects, 타카시마 자쿠로 & 아카사카 메구 & 키타미 사토코
괴롭힘을 당하던 자쿠로는 친구인 키미카를 지키기 위해 그렇게 두려워하던 메구와 사토코에게 반기를 든다. 자신이 좋아하는 마미야 타쿠지가 사랑한 책,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의 구절을 읊으며. 다른 루트에서는 자쿠로는 자신을 둘러싼 환경이 '운명'이라고 순응하며, 그것을 마주보지 않고 도망치지만 이 루트에서만은 그 운명에 저항한다. 이기리라는 확신도 없고, 오히려 진다고 믿고 있으면서도 그 운명에 저항하는 발걸음을 내딛는다. 이것이 그녀를 '멋진 나날들'로 이끌었다.
「자아……당신은 앞으로 나아가세요……그것이야말로 약속된 땅. 멋진 나날들의 시작……」
「아, 저기……혹시 당신은 마미야 군의 비밀을 전부 알고 있는 건가요?」
「비밀?」
「지금 말했어요. 창조주의 마미야 군과 파괴자의 마미야 군 그리고 조화자로서의 마미야 군」
「그건!」
「후후, 그래. 하지만 그 대답은 당신 것이 아냐. 당신은 멋진 나날들을 손에 넣었고 그 외의 것을 잃었어……」
「그러니 당신은 그 질문의 답을 얻을 수 없어……그게 아니면」
아야나 씨가 빙긋 웃는다.
그 순간 나는 어째선지 등골이 오싹해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지금을 모두 버려 볼래? 그리고 다른 영혼의 앞날을 보고 싶어?」
「나, 나는……」
나는 결심했어…….
「지금을 버리지 않아요. 난 지금 여기서 살아 가기로 결심했으니까!」
「응……」
아야나 씨는 희미하게 웃으면서 하늘을 바라본다.
「이제 그 하늘은 여기에 없어. 잃어버린 하늘……, 한 영혼이 만든 세계는 그 하늘을 지웠어. 지금을 버리지 않는다는 소녀는 그렇게 멋진 나날들을 손에 넣었어…….」
3장 Looking-glass Insects, 타카시마 자쿠로 & 오토나시 아야나
또한 죽음을 두려워하며 도망치려하던 마미야 타쿠지는 구세주의 길을 걸으며 무엇 하나 이룬 것 없이 '죽지 않기 위해' 투신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반면 2장의 마미야 타쿠지는 최후에 죽음의 두려움 조차 뛰어 넘고 죽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현재 자신의 의지가 이끄는 대로 키미카를 구하기 위해 투신했다. 같은 행위와 같은 물리적 결과를 얻었지만, 여기에서 느끼는 바는 그것을 지켜보는 플레이어도, 그리고 마미야 타쿠지 본인에게서도 다를 것이다.
2장의 이 키미카 루트는 배드엔딩으로 보는 사람도 있겠지만, 자쿠로가 죽은 이후 죄책감 속에서 그것의 해소를 삶의 목적으로 살던 키미카가 진정한 속죄와 사랑의 의미를 찾아 스스로의 의지로 마미야 타쿠지를 구하려 했고 구세주라는 사명에 얽메이게 된 타쿠지는 마지막에서야 죽음의 공포를 넘어 의지를 갖고 그 순간 가슴이 시키는 일을 했기에 이는 분명 멋진 나날들에 도달한 이야기이다.
세계가 비스듬해져 간다……,
키미카의 몸과 세계는 평행을 잃는다.
절대 엇갈리는 법이 없는 평행에서 수직 낙하의 세계로…….
그녀는 빨려들어간다.
그녀는 말했다. 속죄라고.
그녀는 말했다. 충분하다고.
그녀는 말했다. 그것이 내 세계의 가치였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딴 거 엿이나 먹으라고.
세계가 뭔데. 속죄가 뭔데. 타카시마가 뭔데. 저주가 뭔데. 죽음이 뭔데.
나는 그녀를 껴안고 싶다.
그저 꼭 껴안고 싶다. 이 이상 살지 않아도 좋아. 누구도 살지 않아도 좋아.
세계도, 나도, 키미카도, 아무것도 안 남아도 좋아. 모두 사라져도 좋다.
그저 나는, 그저 나는 그녀를, 꼭 껴안고 싶었다.
죽음의 직전이든, 이 세계에서 단 한 순간이든, 나는 그녀의 살아있는 온기를 느끼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날았다.
나는 키미카를 껴안는다. 꼭 껴안는다.
떨어지는 그 사이……나는 그저 껴안는다. 그녀의 온기를 느끼기 위해……,
이걸 보며, 이런 나의 모습을 보며, 키미카는 울며 말한다.
「바보……」
울고 있어도 기쁜 듯하다. 슬픈데도 기쁜 듯하다. 다양한 감정이 섞여있지만……
그 모든 것보다도 기쁜 마음만이 가장 클 것이다. 그녀는 기쁜 듯이 나를 껴안는다.
꼭 껴안는다.
이젠 놓지 않을 테니까요……. 언제나 이렇게 하고 싶었어요…….
그녀는 말보다 아득히 빠른 속도로 그것을 내게 전했다.
말보다 빠르게 전해지는 것도 있다. 말보다 바르게 전해지는 것도 있다.
세계는 어떤 짧은 시간이라도 의미를 가진다. 의의를 가진다.
멋진 나날들 - It's my own Invention, 마미야 타쿠지 & 타치바나 키미카
멋진 나날들로 이르는 길은 의지 위에 놓여 있고, 그 멋진 나날들은 바로 현재를 충실하게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멋진 나날들로 나아가야 한다는 메시지를 스카지는 작품을 통해 일관적으로 이렇게 주장한다. '행복하게 살아라!'라고.
이 '행복하게 살아라!'는 작품 <멋진 나날들>의 핵심 문구다. 플레이 한 모든 사람들이 이 작품의 핵심 문구로 '행복하게 살아라'를 거론한다. 이 말은 비트겐슈타인의 전쟁일기(MS103, 論理哲学論考 草稿)의 16년 7월 8일 일기에서 처음으로 등장한다.
나는 운명의 구속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나는 행복하거나, 불행하다. 그게 전부다.
이렇게도 말할 수 있다. 선과 악은 없다.
행복한 자에게는 두려움이 있을 수 없다. 그것은 죽음 앞에서도.
시간 속에서 살지 않고 현재 속에서 사는 자만이 행복하다.
현재를 사는 삶에는 죽음이 없다.
죽음은 삶의 사건이 아니다. 죽음은 세계의 사실들 중 하나가 아니다.
영원을 무한히 지속되는 시간이 아니라 비시간성으로 이해한다면
현재 속에 사는 자가 영원히 산다고 할 수 있겠다.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 나는 세계와 일치를 이루어야 한다.
바로 이것이 '행복하다'는 말의 의미다.
그럴 때 나는 나를 구속시키는 낯선 의지와 일치를 이루게 된다.
'나는 신의 의지를 행한다.'
죽음에 대한 공포는 거짓된 삶, 즉 나쁜 삶의 가장 좋은 징표다.
행복하게 살아라!
<전쟁일기>, 16년 7월 8일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
이 '행복하게 살아라!'는 메시지는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논고의 집약이라고 스카지는 해석한 듯 하다. 아래의 <논리철학논고>의 명제들을 통해 이를 생각해볼 수 있다.
5.6 나의 언어의 한계들은 나의 세계의 한계들을 의미한다.
5.621 세계와 삶은 하나다.
5.63 나는 나의 세계이다. (소우주)
5.632 주체는 세계에 속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세계의 한계이다.
나는 나의 언어(경험)를 뛰어넘는 무언가를 상상하거나 지각할 수 없다. 그렇다면 세계의 한계는 나의 언어의 한계와 같다. 이는 나는 나의 세계임을 의미하고, 나는 세계에 속하는 것이 아닌 세계의 한계점이 된다.
6.4311 죽음은 삶의 사건은 아니다. 우리는 죽음을 경험하며 살지는 않는다. 만약 우리가 영원을 무한한 시간적 지속이 아니라 시간의 소멸이라고 간주한다면 영원한 삶은 현재를 사는 사람들에게 주어진다. 우리의 삶은 우리의 시야가 한계를 가지지 않은 것처럼 끝을 지니지 않는다.
우리는 죽음 바깥에 있을 수 없기에, 죽음은 삶 안에 있는 것은 아니다. 시간 역시 우리는 시간 바깥에 서 있을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시간 역시 삶 안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간 속에 있는 사람이라는 개념을 소멸시킨다면 시간은 사라지고 사람은 현재라는 이름의 영원 속에 있게 된다.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은 영원 속을 살아간다. 나는 세계와 일치를 이룬다. 행복하게 살아간다.
삶의 의미는 삶 전체를 조망할 시야가 필요하므로 삶의 바깥에 있다. 그러나 우리는 삶의 너머를 경험할 수 없다. 그러므로 삶의 의미를 생각하는 것은 말할 수 없는 것이며, 이는 넌센스(nonsense)다. 그것을 말하려고 하는 삶은 평생 충족되지 않는다. 이는 평생을 채워지지 않는 불행속에 산다는 의미다.
이 작품의 진정한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마미야 토모사네는 기억을 되찾기 전까지는 스스로를 마미야 타쿠지가 만들어낸 '파괴자'로써의 인격이라고 생각한다. '조화자'인 미나카미 유키를 남기고 '창조자'인 마미야 타쿠지를 없애 동생인 하사키를 지키는 것. 그것이 그의 존재 의의라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모든 사람을 멀리하고, 지켜야 할 대상인 동생 하사키에게 마저 차갑게 대하며 그의 존재 의의를 다하려고 한다. 그리고 그것은 무척 괴로운 일이다. 토모사네의 삶은 그런 괴로움으로 가득차 있다.
「글쎄……어떤 의미일까. 일단, 어느 쪽이든 하사키를 지키는 건 토모사네. 너의 역할」
「유키 넌……」
「응석 부리지마! 언제나 내게 의지하지 말라고.」
「응석…….」
「그래. 하사키를 지키고 싶다면 네 스스로 지켜. 네가 집착하던 파괴자 역할이니 조정자 역할이니 하는 룰은 사라졌으니까」
「……윽」
「지킨다고 한다면야 지금 현실 세계로 돌아가는 방법도 있겠네」
「지금 현실로 돌아가는 방법?」
「응. 예를 들어서 하사키를 마미야 타쿠지 손에 닿지 않는 안전한 장소로 대피시킨다거나」
「먼 장소까지 갈 필요 없이 백주협 마스터가 보호하면 문제없지 않아?」
「보호……마스터에게…….」
「응. 그걸 바란다면 지금 당장 현실로 돌아가면 돼……하사키랑 만날 수도 있고……그녀를 지키는 것뿐이라면 그 방법이 확실해……. 하지만 그건 선택지 중 하나일 뿐……그렇지?」
여긴 유키나 내가 바랐기 때문에 나타난 세계.
그럼 이건 네가 바란 일이 아니야? 유키에게 그렇게 묻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하지만……그 말은 할 수 없다. 유키에게 더 이상 응석부릴 수는 없으니까…….
그래……이 세계를 바란 건……분명……,
「내가 바랐으니까……그래서 난 여기에 있다」
「……응. 좋은 대답이야」
그럼, 나는 왜 이 꿈을 바란 건가?
내가 바란 것…….
지금 이 장소에서 현실 세계로 돌아가……하사키와 마지막 시간을 보낸다…….
하사키의 목숨을 지키고 나는 마미야 타쿠지의 운명에 함께 한다…….
하늘로 돌아간다……즉, 죽는다.
또 하나는…….
멋진 나날들 - Jabberwocky, 유우키 토모사네 & 미나카미 유키
그러나 마미야 타쿠지에게 1회 패배하는 것으로 인해 토모사네는 자신의 진정한 소망을 깨닫는다. 파괴자의 존재 의의가 아닌, 마미야 타쿠지를 쓰러뜨리고 앞으로도 하사키를 지켜나가는 것. 백주협의 마스터도, 유키도 아닌 바로 자신이 하사키의 곁에서 하사키를 지키는 것이라는 순수한 자신의 소망을 찾아낸 것이다.
토모사네가 다시 일어서는 장면부터가 이 작품의 클라이맥스다. 주어진 존재 의의에 속박된 토모사네는 거기에서 벗어나 자신의 의지로 자신의 소망을 쥔다. 마미야 타쿠지를 넘어 서는 데는 성공했지만, 그의 앞을 더 가혹한 운명이 막는다. 추락하는 토모사네를 구하기 위해 같이 추락하는 하사키. 그녀를 구하기 위해 그는 운명에 저항한다.
순간, 공기의 차가움이 바뀐 듯한 느낌이 들었다. 모래와 티끌이 푸른 하늘에서 춤을 춘다.
절대 교차하는 법이 없는 평행으로부터 수직낙하의 세계로……. 하사키와 나는 빨려간다.
하사키의 몸이 달빛으로 인해 실루엣으로 보였다.
디딜 곳은 없다. 마치 하늘을 나는 듯이……,
먼 곳에서 사이렌 소리. 푸르게 비쳐진 하늘에 메아리가 치는 듯하다.
나는 무한한 하늘을 올려다보며 낙하하고 있다.
머리 위에 있는 하사키를 놓치지 않도록…….
달이 웃는다. 신이 웃는다.
이 우스운 모습을, 이 희극과도 같은 비극을,
별들이 돈다. 마치 그것은 댄스. 밤하늘이……신이 우리들을 조롱한다.
빈 그릇을 바닥에 집어던지는 순진한 어린애처럼……, 세계는 텅 비게 된다.
하지만 나는 말한다.
「엿이나 먹어!」
신 따위 상관없어. 운명 따위 상관없어.
나는 토모사네다. 마미야 토모사네. 나는 약속했다.
하사키를 지키겠다고, 하사키를 지키는 히어로라고,
그러니 나는 겁먹지 않는다. 어떤 상대든 겁먹지 않는다.
천국에서 신과 만난다면 그 녀석을 때린다. 지옥에서 귀신을 만난다면 그 녀석을 때린다.
나는 내 손으로 운명을 펼쳐갈 것이다. 희극도 비극도 엿이나 먹어라!
「하사키!」
나는 있는 힘껏 손을 뻗는다.
하늘을 날 수 없는 인간은, 하늘 위로부터 땅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난. 인정 못한다. 이곳에 절망은 없다.
있는 것은 해야 할 일뿐, 이 순간에 해야 할 것,
지금을 살아가고. 내일을 살아가기 위해 해야 할 일뿐.
멋진 나날들 - Jabberwocky II, 마미야 토모사네
이 장면이 바로 '멋진 나날들'에 이르는 길을 무엇보다도 강조한 장면이다. 토모사네는 운명을 의지로써 저항한다. 그 의지란 바로 '지금을 살아가기 위한 일'을 수행하는 것이다. 오토나시 아야나의 말대로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은 영원의 상 아래를 살아간다. 삶 속에서 삶을 사는 것이다.
선과 악은 주체를 통해서 비로소 일어난다.
주체는 세계에 속하지 않으며 세계의 한계이다.
표상의 세계는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으며
선하고 악한 것은 의지를 가진 주체이다.
<전쟁일기>, 16년 8월 2일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
즉, 의지는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의욕이라는 의미보다는 세계를 바라보고 그 속에서 어떤 삶을 살 것이냐는 삶의 자세에 가깝다. 보이지 않는 것에 매몰되고 두려워하며 살아갈지, 나의 세계를 아름답다고 여기며 현재를 살아갈 것인지 주체의 의지를 묻는 것이다.
지금을 살아가는 것을 선택한 타카시마 자쿠로가 멋진 나날들을 맞이했듯, 토모사네와 하사키 역시 멋진 나날들을 맞이한다. 이렇게 맞이한 내일이, 엔딩의 이름이 '멋진 나날들' 이라는 점이 의미심장하다. 이런 결말을 맞이한 토모사네는 키무라와의 대화에서 자신이 느낀 바를 이야기한다.
나는 이 팔도 다리도 심장도 육체도 뇌도 아니다.
당연히 나는 이 길도 강도 하늘도 아니다.
나는, 나다…….
그리고 나의 세계가 세계이며.거기에 틀이 있을 리가 없다.
그러니 의미는 필요 없다.
나의 세계에 덧붙여야 하는 말 따윈 없다.
세계는 직소퍼즐 한 조각이 아니기에.
왜냐면……우리들의 세계는 이렇게 넓다. 영원의 확대를 보이고 있다. 시간도 공간도, 모든 것이.
우리들의 머릿속은 어느정도일까?
우리들의 머릿속은 이 하늘보다도 넓다.
자, 옆으로 늘어놓아 보렴. 우리들의 머릿속은 이 넓은 하늘조차 거뜬히 받아들여……
그리고……당신까지도.
우리들의 머릿속은 바다보다도 깊다.
자, 푸름과 푸름을 거듭해 보렴.
우리들의 머릿속은 바다를 들이킬 거야.
스펀지가 물통 속 물을 빨아들이듯.
우리들의 머릿속은 신과 같은 무게.
자, 둘을 나란히 달아보렴.
다른 점이 있다해도.
말과 소리의 차이일 뿐.
인생의 의미 따윈……물을 필요는 없다.
인생이 불가해 하다고 방황할 필요는 없다.
이 세계도 이 우주도 이 하늘 이 강 이 길……그 모든 불가해함에 방황할 필요는 없다.
사람이 살아간다고 하는 일은 그 자체도 삼켜버릴 정도의 넓이니까.
그것은 신과도 똑같은 크기.
신과 똑같은 무게.
그것은 아름다운 선율과 아름다운 말.
(중략)
「그렇군……. 혹시 언제부턴가 우리들은 있지도 않은 틀, 보이지도 않는 풍경을 보려고 했었던 걸지도 몰라…….」
「있지도 않은 풍경?」
「그래…….」
「피안 저편, 바깥의 세계, 신들의 세계, 뭐든 좋아……. 그렇게 불리는 모든 것들. 그러니 절망한다. 인생의 의미에, 세계의 의미에, 자신의 의미에. 절망이라 하는 건 있지도 않은 풍경을 보는 것일지도 몰라…….」
멋진 나날들 - '멋진 나날들', 마미야 토모사네 & 키무라
이 대화는 스카지가 <논리철학논고>를 보고 느낀바를 나타낸 단면이다. 이를 에밀리 디킨슨의 시 <The Brain is wider than the sky>를 인용하며 설명한다. (실제 시의 일반적 해석과는 조금 다르다.)
인간의 머릿속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를 모두 담을 수 있으며, 이는 곧 나는 세계와 같다. 그렇기에 나와 세계의 무게는 같으며, 다른 점이 있다면 그것을 이야기 하느냐(say), 보여지느냐(show)의 차이가 있을 뿐.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은 세계와 그 너머를 이해하려 하지 않아도 괜찮다. 사람이 살아가는 삶이란 세계와 등가이기 때문이다.
<논리철학논고>에서는 이를 이렇게 언급한다.
6.4 모든 명제는 등가이다.
우리는 경험에서 개념을 추출해낸다. 가령 닭을 한번도 본 적 없는 사람이 말하는 '닭'과 양계장에서 매일 같이 다양한 닭을 보는 사람이 말하는 '닭'은 같은 개념을 지칭하는 것일까? 언어는 선험적인 것이 아니라 약속이다. 그렇기 때문에 언어로 구성된 명제들은 모두 분석할 경우 요소명제(개념에게 이름, 존재를 부여하는 더 이상 분석될 수 없는 명제.)에 도달한다. 이 점에서 모든 명제는 등가이다.
6.41 세계의 뜻은 세계 바깥에 있어야 한다. 세계 내에서는 있는 것은 그대로 있고 발생하는 것은 그대로 발생한다. 세계 안에 가치(체계)는 없다. 만약 가치가 있다면 그것은 무가치일 것이다. (하략)
우리는 세계 자체의 가치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세계 전체를 조망해야 한다. 이는 세계 바깥쪽에 존재해야 가능한 일인데, 우리는 세계의 바깥에 존재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세계의 가치를 알 수 없다.
6.52 모든 과학적 의문이 해결되었을 때에도 우리는 삶의 문제가 완전히 취급되지 않은 채로 남겨져 있다고 느낀다. 물론 이때 어떤 의문도 남아있지 않게 되고 이것 자체가 (삶의 문제에 대한) 답변이다.
6.521 삶의 문제에 대한 해결은 그 문제에 대한 사라짐에서 보여진다.
우리를 이루는 세계의 물리 법칙등을 포함한 감각으로 포착할 수 있는 문제들을 모두 해결하더라도 삶의 의의와 같은 문제들의 답은 주어지지 않는다. 이러한 탐구가 끝났을 때 비로소 삶의 문제는 탐구될 수 없음을 깨닫는다. 결국 이러한 삶의 여러 문제들(죽음, 신, 종교, 아름다움 등의 형이상학적 주제)은 그 문제 자체가 사라져야만 해결될 수 있다는 의미다.
7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그렇기에 우리들은 그런 문제들에 대해서 침묵해야 한다. 이는 이러한 주제들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알 수 없다는 뜻이다. 2.172~2.174절을 통해 우리는 예술이나 종교와 같은 것들을 말할 수 없으며(논리적 표현) 그것들은 단지 보여진다고(감각적 수용) 주장했다. 행복을 충족이라고 한다면, 이러한 문제들을 논리적으로 말하려고 하는 삶은 충족되지 않는 삶이다. 그것들은 단지 보여질뿐이다. 나를 세계의 밖이 아니라 나의 세계 안에 둘 때 비로소 채워질 수 있고 충족된다.
「사람은 죽음을 모르나, 그럼에도 사람은 죽음을 알며 그 때문에 행복 속으로 빠지는 법을 배웠다……. 절망이란, 행복 속으로 빠지는 게 가능한 사람에게 부여된 특권이지.」
「특권이라니……암만 봐도 나쁘잖아」
「그러네, 그래도 그 때문에 사람은 언어를 손에 넣었어……. 하늘을 아름답다고 느꼈어……. 좋은 세계가 되기를 빌기도 했어……. 말과 아름다움과 기도. 세 개의 힘과 함께……멋진 나날들을 손에 넣었어. 사람이여. 행복해져라! 행복에 빠지는 법 없이, 이 세계에 절망하는 법 없이 그냥 행복하게 살아라고.」
멋진 나날들 - Jabberwocky II, 마미야 토모사네 & 미나카미 유키
미나카미 유키의 말대로, 행복은 그것을 바라지 않는 한 절망은 없다. 허나 인간은 죽음과 같은 삶 바깥에 있는 것들을 알고자 했고, 그것의 존재를 알았다. 그렇기 때문에 절망을 알았고, 동시에 행복을 알게 되었다.
사람은 자신의 세계를 자신의 입장에서 설명할 수 있게 되었고, 세계를 아름답다고 여길 수 있고, 자신이 이상으로 하는 세계를 그릴 수 있게 되었다. 말을 통해 논리를 얻을 수 있었고,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감성이 있으며 이를 기반으로 더 나은 세계를 바라는 의지(기도)를 얻을 수 있었다. 이 세가지 힘과 더불어 사람은 행복을 모른채 행복에 젖어 사는 일 없이, 공포에 매몰되어 절망하는 일 없이 절망의 존재를 알고 그 위에서 행복해질 수 있게 되었다.
스카지는 그가 읽은 철학자의 일부를 하나의 이야기로 녹여내었다.
삶의 의의와 같은 것에 매몰되지 않고, 삶 밖에 있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지금 이 순간의 삶에 충실하는 것.
그렇게 사람들은 앞으로 나아간다. 잠시 멈춰서있다고 여길지도 모르지만, 멈춰서는 일 없이 앞으로 나아간다.
단 하나의 마음을 새기고. 단 하나의 정언 명령을 새기고.
행복하게 살아라!
<멋진 나날들>은 이런 메시지를 담은 이야기이다.
참고 전쟁일기,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저, 읻다
논리철학논고,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저, 동서문화사
논리철학논고 해제, 조중걸 저, 북핀
번역문 참조 Home님(https://blog.naver.com/anged86)
세계관 해석 읽기
아마도 이 작품에서 가장 논란이 되는 부분은 바로 <종말의 하늘Ⅱ> 엔딩일 것이다. 누구는 이것을 이 모든 이야기가 꿈이었다는 뜻으로, 누구는 무의미한 것으로, 누구는 전작 <종말의 하늘>의 연장선상임을 암시하는 도구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대체 이 <종말의 하늘Ⅱ>는 무엇인가?

<종말의 하늘Ⅱ>를 이해하기 전에 먼저 최중요 인물인 오토나시 아야나에 대해서 이야기해야한다. 오토나시 아야나는 작중 내내 뜬금없이 튀어나와서 무슨 소린지 알 수도 없는 헛소리만 하다가 사라지면서 플레이어와 등장인물을 괴롭히는 캐릭터다. 그녀는 대체 어떤 존재인가?
나는 세계에서 가장 어려운 천재의 말을 되새기고 있었다.
그것은 단순하고 누구나가 알고 있는 답이면서도 대부분의 사람이 도달하지 못한다.
왜냐면, 이 말엔 분명 신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신을 믿는다는 건 삶의 의미에 관한 질문을 이해하는 것이다.
신을 믿는다는 건 세계에 있는 사실만으로 문제가 해결 되는 게 아님을 깨닫는 것이다.
신을 믿는다는 건 삶이 의의를 지닌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신이라는 자는 기적도 일으키지 않으며, 세계를 일주일만에 만들지도 않는다.
기본적으로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며……, 그러면서도 무책임하게……,
우리들에게 행복하게 살아라고 언제나 귓가에다 속삭일 뿐이다.
그리고 모든 조화를 누구를 위해서가 아닌 혼자서 만들어 나갈 뿐인 존재다.
그것이 신이라 불리는 자의 정체다…….
신은 거짓말도 부정도 모조품도 천함도 더러움도……그 모든 존재를 허락하고 있다.
그 어떤 부조리가 우리들 인생에 관여한다 해도 신은 우리들에게 말할 것이다.
"행복하게 살아라!"
멋진 나날들 - '멋진 나날들', 마미야 토모사네
스카지가 작품 내에서 묘사하고 있는 '신'의 모습은 오토나시 아야나와 정확하게 부합한다.
기적을 일으키지도 않고,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무책임하게 단지 등장인물들이 멋진 나날들로 나아가는 것을 바라본다. 자쿠로가 운명에 순응하고 넘어서지 못해 뛰어내릴때에도, 마미야 타쿠지가 구세주의 길을 버리지 못할때에도 그녀는 그것을 바로 잡기보다는 그들의 선택을 담담히 되뇌이기만 한다. 그들이 멋진 나날들로 나아갈 수 있을지 바라보며 그 길로 나아가는 방법을 이야기 하진 않고, 담담히 그렇게 나아가라고만 한다.
비트겐슈타인의 사상을 갖고, 작품을 초월해 존재할 수 있는 존재를 추론하면 간단히 다다를 수 있는 발상이 있다.
아야나는 스카지의 아바타라는 해석이다. 그는 이 이야기의 저자이므로 신의 관점을 가질 수 있고, 논고의 감상을 녹여낸 작품이기에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이 녹아있는 것도 당연하다.
작중 아야나는 <종말의 하늘Ⅱ>에서 유키의 꿈에 불과한 유령의 방 에피소드를 알고 있음은 물론이고, 3장에서 자쿠로가 가졌을 다른 미래도 그 시간축에서 알고 있었다. 적어도 작품 안에서는 거의 전지의 능력을 가졌다. 이러한 위치에 놓일 만한 존재는 작품 내의 신적 존재거나, 혹은 작품 외의 존재일 것이다. 이 경우 내부 세계의 초월자를 설정하는 것보다는 외부 세계의 존재를 가정하는 것이 좀 더 합리적이다.
건반의 소리가 나의 귓가에 울려 퍼진다.
그리고 다른 누군가의 귀에 닿는다.
누군가가 만든 곡을 내가 연주한다.
그 사람은 내가 연주한다고 생각하며 작곡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그 곡을 연주한다. 적당히 좋아하는 곡이니까. 감동한 곡이니까.
그 선율은, 누군가의 귀에 닿는다. 나 이외의 누군가에게.
접시를 씻고 있는 하사키에게.
최근 구슬 뿐만 아니라 정말 장대까지 먹으려고 드는 마스터에게.
가게에 모이는 여장 남자놈들에게.
음악은 울린다. 점내에 울린다.
세계에 울린다. 세계의 한계까지 울린다.
거기서 누군가가 이걸 듣고 있을까? 듣고 있지 않을까?
그렇더라도 나는…음악을 계속 연주한다.
그 누구를 위해서도 아닌,
그것을 듣는 당신을 위해서.
멋진 나날들 - '멋진 나날들', 마미야 토모사네
외부 세계의 존재를 가정한다면 빼놓을 수 없는 존재가 있다. 바로 플레이어다.
<멋진 나날들>의 소제목은 루이스 캐럴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와 <거울 나라의 앨리스>의 소제목에서 따왔다. 이 작품들은 앨리스가 토끼 굴 속으로 빠지면서 만난 신기한 세계를 모험하면서 경험한 것들에 관한 이야기다. <멋진 나날들>이라는 세계를 바라보고 경험하는 플레이어를 상정한 작품이 <멋진 나날들>이라고 가정한다면 종말의 하늘Ⅱ에서 나오는 수수께끼를 일부 해석해볼 수 있다.
「예를 들어 타카시마 자쿠로 씨가 자살한 순간부터 시작된 영혼의 편재전생. 혹은 그 여름의 날, 사와이 마을에서 유키 씨가 죽은 순간부터 시작된 영혼의 편재전생……. 혹은 유키 씨가 기억 못하는 수수께끼의 지점 예를 들어 종말의 하늘이 나타난 어느 지점에서 이어지는 영혼의 편재전생.」
「종말의 하늘이 나타나? 그게 뭐야? 그런 지점이 있어?」
「어디까지나 가정……. 그렇게 상상하는 일도 가능해. 어느 지점, 세계의 마지막이라 말해진 날. 세계가 끝나있음에도 상관없이 영혼은 끝없이 그 세계를 루프 시켜……흡사 존재하는 것처럼 행동해 왔어.」
멋진 나날들 - 종말의 하늘 2, 미나카미 유키 & 오토나시 아야나
바로 종말의 하늘Ⅱ에서 나온 단 하나의 영혼, 세계혼에 관한 해석이다.
오토나시 아야나는 <멋진 나날들>이라는 작품의 등장인물들이 단 하나의 혼이 편재전생하여 만들어진 세계라고 가정을 세운다. 그리고 그 연장 선상에는 마치 전작인 <종말의 하늘>의 엔딩조차 넣고 있다. 아야나의 가정을 진실이라고 받아들인다면, <멋진 나날들>은 <종말의 하늘>의 결말 이후 멸망한 세계의 이후를 그리고 있다는 뜻이 된다. 미나카미 유키는 전작의 미나카미 유키토와의 연결성도 암시하는데, 이를 모두 고려한다면 결국 작중 등장인물과 <종말의 하늘>의 등장인물은 모두 하나의 존재라는 생각으로 이어진다.
앞선 이야기를 모두 고려한다면 세계혼의 후보로 플레이어를 제시할 수 있다. 이 작품은 <종말의 하늘>의 이미지를 떨쳐내기 위해 제작된 작품으로, 어떻게 보면 <종말의 하늘>의 팬들에 대한 메시지이다. 그렇기 때문에 두가지 세계를 하나로 묶기 위한 장치로 이러한 가정을 도입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혹시……세계는 이미 옛날부터 끝나있을지도 모른다…….
나라는 영혼은……이런 일을 몇억 회……몇조 회도 한 듯한 느낌마저 든다.
모든 영혼을 연기해 왔을지도 모른다…….
어떤 때는 미나카미 유키,
어떤 때는 마미야 타쿠지,
어떤 때는 유우키 토모사네,
어떤 때는 타카시마 자쿠로,
어떤 때는 마미야 하사키,
어떤 때는 와카츠키 카가미,
어떤 때는 와카츠키 츠카사.
그리고,
다시,
처음으로 하려는 느낌도 든다.
멋진 나날들 - 종말의 하늘 2, 미나카미 유키
플레이어는 미나카미 유키의 시점으로, 마미야 타쿠지의 시점으로, 타카시마 자쿠로의 시점으로, 마미야 토모사네의 시점으로, 더 나아가 <종말의 하늘>의 등장인물의 시점까지 같은 세계를 다른 시점으로 관찰한 존재다. 등장인물들은 플레이어가 <종말의 하늘>과 <멋진 나날들>이라는 세계를 여행하기 위한 아바타라고 생각할 수 있다는 뜻이다. 작품의 부제, 불연속 존재는 마미야 토모사네를 지칭하는 것뿐만 아니라 이러한 각각의 연속되지 않은 존재를 통해 세계를 경험한 플레이어를 지칭하는 말로도 해석할 수 있다.
이것들을 고려한 후라면 종말의 하늘Ⅱ가 무슨 목적으로 만들어졌는지 어느 정도 윤곽이 보인다.
6.54 나의 명제들은 다음과 같은 점에 의해서 하나의 주해 작업이다. 즉 나를 이해하는 사람은, 만일 그가 나의 명제들을 통해-나의 명제들을 딛고서- 나의 명제들을 넘어 올라간다면, 그는 결국 나의 명제들을 무의미한 것으로 인식한다. (그는 말하자면 사다리를 딛고 올라간 후에는 그 사다리를 던져 버려야 한다.) 그는 이 명제들을 극복해야 한다. 그러면 그는 세계를 올바로 본다.
7. 말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비트겐슈타인이 <논리철학논고>를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하지만, 그것을 이야기 하기 위한 사다리로 사용했듯(논리철학 논고의 핵심은 말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는 것인데 정작 비트겐슈타인 본인이 그런 말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책이 바로 논리철학논고다.), 스카지 역시 <멋진 나날들>을 자신의 생각을 플레이어에게 전달하기 위한 사다리로 사용했다는 의미로 해석한다면 종말의 하늘Ⅱ의 존재를 통해 하고자 하는 바는 명확하다. 플레이어가 작품의 감상만 가진 채, <멋진 나날들>의 세계는 무의미한 것들처럼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다.
어디선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난다.
나를 부르는 반 친구의 목소리…….
그래서 난 되돌아보았다…….
「오토나시 아야나 씨-」
「네……」
「하아, 하아……으휴, 찾아다녔다구. 이런 장소에서 혼자 뭐하는 거야? 종업식 시작해 버린다구.」
「시작된다……」
「그래. 시작해 버린다구.」
「후훗」
「왜, 왜 그래?」
「끝난 직후인데, 벌써 시작이라니…….」
「어?」
「아니……가자……. 그 시작의 지점으로…….」
멋진 나날들 - 종말의 하늘 2, 오토나시 아야나 & 이와타 미우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서는 플레이어의 아바타인 미나카미 유키가 사라지고 오토나시 아야나만 남은 채 갑자기 현실적인 종업식 이야기로 넘어간다. 작중 내내 세계에서 유리된 존재였던 오토나시 아야나가 현실적인 영역으로 끌어내려지는 유일한 장면.
이는 <멋진 나날들>이라는 작품에서 떠나 플레이어를 현실로 되돌리려는 장치라고 생각해볼 수 있다. 특히 마지막 대사인 '그 시작의 지점'이라는 표현에서 이 작품을 만들어 낸 스카지와 케로Q, 이 세계를 여행한 플레이어, 그리고 <멋진 나날들> 이 모든 것의 시작 지점은 현실이기 때문에.
살짝 차가운 바람.
찬 바람을 느끼며 우리는 서로의 손을 잡고 걷는다…….
일상 속 한 걸음. 특별하지 않은 한 걸음을……내디딘다.
이에 감사하며……, 우리는 살아간다…….
둘이서 웃으며……살아가자.
나는 마음속으로 강하게 맹세했다.
수많은 생명이 그랬듯이……,
나도 최초의 한 걸음을 내디딘다.
이 너머에 있는 것은, 아마도
멋진 나날들
'비평 > 게임'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니어 오토마타 - 이해와 존재의의 그 너머 (0) | 2022.04.09 |
---|---|
백일몽의 청사진 - 세계라고 불린 소녀 (0) | 2022.04.09 |
히마와리 -Pebble in the sky- - 이야기의 힘 (0) | 2022.04.09 |
아일랜드 (ISLAND) - 아쉽기도 하지만 즐거운 이야기 (0) | 2022.04.09 |
아마츠츠미 - 신을 통한 '인간 다움' (0) | 2022.04.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