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더 퍼스트 슬램덩크(THE FIRST SLAM DUNK)
그야말로 전설의 귀환. 원래 명작으로 명성이 높은 슬램덩크의 최신 애니화에 더불어 작중 최고의 에피소드로 불리는 산왕전을 극장판 애니메이션으로 내보낸다? 이건 처음부터 안 볼 수가 없는 작품이었다. 그리고 이만큼 기대가 높은 작품이면 아무래도 보고 나서 김이 조금 새기 마련인데 이 작품은 모든 전개를 다 알고, 주요 명장면들을 모두 아는데도 불구하고 시선과 집중력을 모조리 다 빼앗아가는 그런 마력의 작품이었다. 연초부터 2023 베스트 아니메를 만난 것 같아서 기분이 몹시 좋다.
작품을 한 줄로 표현하자면 '내레이션을 내게 맡긴 농구 다큐멘터리'처럼 느껴지는 작품이었다. 이 작품이 집중하고 있는 것은 '만화 슬램덩크'보다 '북산고교 vs 산왕고교의 농구' 였다. 현실에서 이뤄지고 있는 스포츠 경기를 보는 느낌을 받을 정도로 압도적인 현장감이 느껴지는 작품이었다. 농구 코트 한복판에 전지적 시점으로 떨어져 내가 뛰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 일으키는 현장감으로 경기 내용에 수식어를, 해설을, 내레이션을 계속 붙이고 있는 나 자신과 만날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이런 현장감의 마법은 바로 음향에 있었다. 이 작품을 지배하는 음향은 배경음악도, 테마곡도 아닌 바로 효과음이었다. 러닝타임의 6할에 가까운 시간에는 배경음악이 존재하지 않는다. 오로지 등장인물의 말소리와 농구공 드리블 소리, 숨소리, 열광하는 관객들의 소리만이 작품을 지배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작품이 '영화'나 '애니메이션'이라기 보다는 '스포츠 경기'처럼 관람객에게 다가온다. 그리고 작품 내의 감정선이 고조될 때, 강한 비트의 배경음악을 깔아 관람객의 감정선도 같이 끌어 올려서 작품에 열광하게끔 만든 구조다.
이젠 내겐 림 밖에 보이지 않아
그리고 작품의 클라이맥스에서 찾아오는 소리가 없는 세계는 이 작품의 꽃 중의 꽃. 산왕전 최고의 클라이맥스인 라스트 1분을 그 어떤 소리도 없이 표현해낸다. 정적 끝에 찾아오는 하이파이브 소리 하나가 가슴에 울리면서 감정선을 최고조로 끌어올린다. 그만큼 음향의 완급 조절로 관람객의 감정선을 조절하는데 일가견이 있는 작품이었다. 이것 하나만으로도 작품을 보러 와서 다행이다라는 마음을 들게 해준 명장면 중의 명장면. 내가 좋아하는 정대만의 대사를 살짝 비틀어 표현하자면 '이젠 숨소리마저 들리지 않아'라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현장감을 중시하느라 만화 슬램덩크를 많이 포기했냐면, 그것 또한 아니었다. 이 작품의 그림은 전적으로 이노우에 다케히코의 만화 그림을 그대로 스크린으로 옮기는 데 많은 리소스를 할애한 것처럼 보인다. 3D CG를 적극적으로 사용했지만, 만화의 그림체를 그대로 가져온 덕에 이질감은 그렇게 크지 않다. 몇몇 어색한 장면이 있긴 하지만, 속도감 있는 농구 경기 장면 안에서는 그런 부분이 덜 느껴지는 편이다. 그래서 옛날, 그 시절 내가 좋아했던 만화가 스크린에서 그대로 부활한 느낌도 동시에 준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건 역시 오프닝 무비에서 펜선으로 캐릭터들을 그려내고, 그 캐릭터들이 스크린 앞의 관람객을 향해 걸어오는 시퀀스. 만화에서 영화, 애니메이션까지 관람객의 추억을 향해 성큼 성큼 다가오는 부분이 굉장히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또 한번 보고 싶은 명장면이었다.
포기하면 그 순간이 바로 시합종료에요.
그리고 마냥 산왕전을 영상화 시킨 것에 그친게 아니라 본래 작품에서 이야기 비중이 낮았던 송태섭의 개인 스토리를 처음으로 공개한 것도 인상적이다. 그야말로 '다 아는 내용'을 또 봐야 하는가?에 대한 부분적인 답변이라고 할 수 있겠다. 전반적으로는 송태섭의 원작 비중을 생각하면 이만큼 개인 서사를 할애하여 '관람객의 기억과 더불어' 이제서야 비등비등하게 완성된 북산고교 농구부를 만날 수 있긴 했지만 개인적으로 아쉬웠던 것이 분량이 지나치게 많았다는 생각도 든다. 격렬한 농구 경기 중간 중간에 굉장히 서정적인 개인사가 펼쳐지는데 이 분위기의 낙차가 관람객의 감정선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지만, 후반부에 들어서면 '또?'라는 생각이 절로 나왔다. 이 부분은 분량을 조금 줄이는 게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몇몇 명장면들이 빠진 것도 아쉽다. '정말 좋아합니다. 이번엔 거짓이 아니라구요'는 개인적으로 슬램덩크에서 명대사 1, 2위를 다툴 정도로 좋아하는 장면인데 그게 빠졌다. 사실 강백호가 농구부에 입부하게 되는 계기가 되는 그 대사와 수미상관 구조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TVA라면 빠질 수 없었지만 앞부분의 내용이 나오지 않는 영화 더 퍼스트 슬램덩크에서는 빼도 괜찮겠다는 작가의 판단이 들어갔으리라고는 생각한다. 그 외에도 정대만의 '나는 누구지?'라던가, 채치수의 각성이라던가 송태섭에게 할애된 러닝타임만큼 제거된 명장면도 많았다. 그 부분은 아쉽지만, 그래도 그래서 극의 완성도를 해쳤다는 생각은 들지 않기 때문에 그냥 작은 아쉬움으로만 남는다고 해야할까.
힘들어도, 심장이 쿵쾅거려도, 있는 힘껏 괜찮은 척을 한다.
팬이 아닌 작품에게도 아마 훌륭한 작품으로 다가갈 작품이다. 관람하고 나오는 데, 아버지와 같이 온 아들이 슬램덩크 만화책을 읽어 보고 싶다고 아버지에게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았다. 아마 세대를 초월해서 가슴 한 켠에 무언가 긍정적인 에너지를 주는 작품일 것이다. 단순한 농구 영화로도 충분히 매력적인 모습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역시 이 작품은 슬램덩크의 팬에게 주는 선물이 아닌가 싶다. 단순히 스크린에 비치는 것은 '슬램덩크'가 아니라 그 만화를 좋아했던 옛 시절과 그때 가슴 속에 남아 있던 불씨를 다시 일깨워 주는 감동이기 때문이다. 영화 OST의 제0감이 울려퍼지는 그 동안 계속해서 심장은 쿵쾅거렸다. 시합 중인 선수와 같이, 어린 시절 느꼈던 그 감정과 함께. 올 한해 길이 기억될 좋은 작품으로 계속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숨 소리 마저 잊을 정도로' 몰입했던 기억과 함께. 모두에게 추천할만한 작품이다.
드리블이야 말로 키가 작은 선수가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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