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버 펑크: 엣지 러너(Cyberpunk: Edgerunners, 2022)
이 세계에서는 어떻게 사느냐로 이름을 떨치는게 아냐...
어떻게 죽느냐로 기억되지.
최근에는 시간도 별로 없고, 대항해시대 오리진을 플레이하느라 바빠서 오타쿠 짓을 얼마 못했는데 그런 내 삶에 갑자기 훅 치고 들어온 작품. 시라가 추천해 준 작품인데, 취향에 맞을 것이라는 추천사와 함께 보라고 강권하길래 어차피 SF는 좋아하니까하고 봤는데 개인적으로는 트리거의, 이마이시 히로유키의 커리어 하이를 장식하는 작품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강렬한 그런 작품이었다. 아니, 어쩌면 유명세만 탄다면 애니메이션 사에 당당히 자리 매김할 수 있는 역대급 작품이었다. 원작인 사이버펑크 2077은 발매 초기의 악평으로 플레이 해보지 않았는데 한 번 해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매력이 가득찬 작품.
이 작품의 키워드는 크게 압축하자면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꼽는 키워드는 바로 '꿈'과 '중력'. 사실상의 더블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데이비드-루시 모두에게 해당하는 키워드다.
첫번째 키워드인 꿈에 대해 먼저 이야기해보자. 주인공인 데이비드는 자신의 꿈이 없는 존재이다. 맞지도 않는 아카데미를 괴롭지만 꾸역 꾸역 다녔던 것은 어머니의 꿈이었던 아들이 아라사카 기업에 입사해 높은 자리에 오르는 것을 이뤄주기 위해서. 그리고 이것은 마침내 유언이 되어 데이비드를 사로 잡는다. 그러나 그 꿈을 이룰 현실에 막힌 데이비드는 결국 방황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소녀 루시를 만나 사이버 펑크의 길을 걷게 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알게 된 동료인 메인의 유지를 잇고 루시를 달로 보내주겠다는 꿈을 갖게 된다.
반면 고아였던 루시는 아라사카에게 넷러너로 길러지면서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기업인 아라사카를 위해 헌신한다는 타인에게 주어진 꿈을 주입받아 그 영광을 이루기 위해 피나는 노력과 고통을 감내하지만 그것의 공허함을 깨닫고 도망쳐서 나이트 시티로 오게 된다. 이후 달에 가고 싶다는 꿈과 데이비드를 지키겠다는 꿈을 꾸게 된다.
두 사람의 공통점은 같다. 그것이 긍정적인 관계인지 부정적인 관계인지 여부에 관계 없이 그 꿈은 다른 사람에게서 가져온 꿈이라는 것이다.
"꿈은 다른 사람의 것이어선 안 돼."
"넌 꿈을 찾았다는 듯이 들리네."
"넌 저기를 지옥이라고 했지만 내겐 여기가 지옥이야. 난 어딘가 멀리 가고 싶어."
그런 두 사람이 만나고 나서야 진정한 의미에서 자신의 꿈을 갖게 된다. 서로 다른 방식으로.
데이비드는 여전히 타인-루시-의 꿈을 이루기 위해, 그리고 루시는 자신이 달에 가고 싶다는 소망 그 이상으로 데이비드라는 존재 그 자체가 자신의 꿈이 된 셈이다. 하지만 데이비드는 그 빌린 꿈을 목숨까지 내걸 수 있을 정도로 오롯이 자신의 꿈으로 만들고 루시는 자신의 꿈조차 내던지고 다른 누군가를 자신과 동치시킬 수 있는 진정한 사랑을 깨닫게 된다.
"나 같은건 지키지 않아도 돼. 너만 살아 있기만 한다면, 그것만으로도 좋았는데…."
"나 같은건 아무래도 좋아. 아무것도 없는 나보다 네가 너의 꿈을 이뤘으면 해. 그게 내 꿈이야.
그걸 이룰 수 있다면 후회는 없어."
극 중 클라이맥스에 해당하는 달을 배경으로 한 키스신. 메인 사후 함께 있지만 엇갈리기만 하던 그 둘은 마침내 서로의 꿈이 교차하는 지점에 서게 된다. 그리고 그 두 사람을 비추는 것은 그 둘의 꿈인 바로 달이다. 관람하는 모든 사람들이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밖에 없는 지점이다. 이 이야기의 핵심 키워드가 바로 꿈이라는 것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장면이다. 하지만 이 두 사람은 이윽고 현실이라는 장벽에 가로막히게 된다.
바로 여기서 두 번째 키워드인 '중력'이 등장한다. 이 작품에서 '높이'는 굉장히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데이비드를 속박했던 어머니의 주박도 '아라사카의 가장 높은 곳'에 도달하는 것이었고, 빌런 패러데이의 말 '이 도시에서 하늘을 나는 것은 특별하다'에서 주는 느낌은 높이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다. 또한 작중에서 데이비드가 임플란트 시술 후 카츠오에게 복수한 후 더 이상 있을 곳이 사라진 이후에 한 행위는 높은 곳에서 쓰레기 더미로 떨어지는 행위였다. 높이는 그 사람이 가지는 권위나 위치에 대한 흔한 은유이지만 이 작품에서는 이것이 적나라하게 쓰인다. 그리고 그 높이를 권위로 만들어주는 것은 바로 중력이다.
이 작품에서 중력이란 나이트 시티의 모든 사람들을 높이의 주박에 얽매이게 하는 저주이자 그 모든 주박을 깨부술 수 있는 힘으로 작용한다. 핵심 키워드인 '꿈'이 루시가 달에 가는 것, 즉 이러한 주박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곳으로 상징되는 것도 바로 달에는 지구의 중력이 직접적으로 미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엄밀하게 말하면 작용하고 있다.)
작중에서는 이 중력이 생각보다 절대적으로 작용하는데, 레베카 사망 사유 역시 아담 스매셔의 낙하 공격이며 주인공 일행들은 강한 힘을 지니고 있지만 아라사카나 밀리테크와 같은 거대 기업 앞에서는 한없이 작은 존재다. 데이비드 일행을 수하처럼 부리는 패러데이조차도 아라사카 앞에서는 얼마든지 버릴 수 있었던 카드였듯. 그래서 루시가 납치당한 시점에서 그녀를 구해낼 수 있는 힘이 없는 데이비드 앞에 양날의 검이 놓인다. 바로 사이버 스켈레톤이다.
사이버 스켈레톤은 반중력 기능이 포함되어 있다. 이 작품에서 높이, 중력이 등장인물 전부를 속박하는 존재라는 것을 생각하면 이 모든 속박을 깨부술 수 있는 힘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실제로 데이비드 일행은 그 어떤 수단과 방법을 쓰더라도 루시를 구해낼 수 없었겠지만, 스스로의 몸을 대가로 루시를 구해내듯 운명을 거스르는 힘으로 작용한다. 그리고 두 사람의 꿈이 교차되는 클라이맥스 또한 공중에서 이뤄지는 등 중력을 운명의 은유로 계속해서 선보이고 있다.
결국 결말에서 데이비드가 아담 스매셔에게 패한 것도 반중력 장치의 고장으로 스스로의 '무게'를 더 이상 지탱할 수 없는 지점이었다. 세계관 내의 절대적인 법칙인 중력을 끝내 거스를 수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의 꿈을 이뤄낸 데이비드와의 대비 역시 이 작품에서 가장 돋보이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처음부터 '어떻게 죽느냐로 기억된다'라는 문구를 통해 암시했듯, 작품은 비극적인 결말을 맞는다.
"달 여행이 25만 에디야. 생각보다 싸네."
"그냥 관광 상품이잖아."
시즌2를 고려해서인지 마지막 에필로그도 루시가 달을 '패키지 여행'을 통해 가는 것으로 이어지는데 이는 여전히 루시가 중력에 속박되었음을 의미한다. 작중 달 여행 상품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데이비드가 생각보다 저렴하다는 반응에 루시는 그냥 관광 상품일 뿐이라고 대응한다. 이는 루시의 목표 지점인 달이 단순히 관광이 아닌 데이비드와 함께 하는 것이라는 꿈의 변경을 암시하는 장면과 동시에 관광만으로는 여전히 나이트 시티의 중력에 속박된다는 것을 은유한다.
데이비드는 꿈을 이루고 장렬하게 산화했다. 하지만 살아남은 루시는 데이비드를 구하지도, 중력이라는 속박에서도 벗어나지 못했다. 이는 루시라는 캐릭터에게는 아직 이뤄야할 일이 있음을 의미한다. 아마 시즌2가 나온다면 루시를 메인으로 내세우는 이야기가 전개되지 않을까 생각된다.
난 더 이상 나 자신이 두렵지 않아. 내가 두려운 건, 언젠가 네가….
10화 남짓의 짧은 작품이었지만 굉장히 강렬한 작품이다. 후반부 전개가 다소 빠르다는 흠은 있지만 그 정도는 웃고 넘길 수 있을 정도의 강렬한 연출과 가득찬 밀도, 매력적인 플롯이 압도적인 작품이었다. 서로가 서로를 그리는 모습과 그것이 어긋나고 다시 이어지는, 마치 불꽃같이 활활 타오르는 그런 강렬한 사랑을 보니 최근 답답했던 마음이 뻥 뚫리는 듯한 그런 기분이 들었다. 별 이변이 없다면 올해 최고의 작품이 되지 않을까 생각된다. 이런 작품들을 마주할 수 있기에 오타쿠를 그만둘 수 없는 것이다.
이 정도의 작품을 낼 수 있는 걸 보아하니 앞으로의 트리거의 행보 또한 기대 된다. 루시를 메인으로 내세운 시즌 2가 나오길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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