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소리의 형태(聲の形)
기본적으로 사람은 서로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생물이다. 사람은 서로의 마음을 엿볼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은 홀로 살아갈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서로를 조금이라도 더 이해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 노력이 바로 '목소리', 즉 대화이다. 사람은 서로 대화하며, 그 사람에 대해 알아가고, 이해하는 것으로 관계를 구축한다.
하지만 세상에는 그것조차 어려운 사람이 존재한다. 청각을 잃거나, 말을 잃은 사람들. 대화가 소통의 전부라면, 그 사람들과는 어떻게 서로를 이해해야 하는가?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한가?
이 작품의 제목은 목소리의 형태(聲の形)로, 일본어에서 목소리는 현대에서는 声라고 쓴다. 聲이 복잡한 한자이기 때문에 일상에서 자주 쓰이는 단어를 좀 더 편하기 위해서 줄인 것이다. 하지만 작가 오이마 요시토키는 聲의 본질에 주목한다. 聲는 声(소리)과 殳(손,又), 耳(귀)의 합성어다. 즉 목소리를 전하는 방법은 소리 만이 아니다는 의미에서 이 작품의 제목을 지었다. 이 작품을 통해 그리고 있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목소리, 서로 이해하는 과정, 소통이다.
애니메이션 <목소리의 형태>는 바로 이 부분을 가장 잘 살린 작품이다. 감독 야마다 나오코는 이전 작품에서부터 언어 외적인 방법으로 많은 것을 전하려고 노력한 감독이다. 특히 '발짓'에 대한 집착이 굉장한 감독이다. 이번 작품 역시 이런 언어 외적인 소통을 가득 집어넣었다. 극중 초반 쇼야의 마음을 대변해주는 '샤프펜슬' 장면이나, 관람차에서 카메라 너머로 비치는 우에노의 발짓에서 엿보이는 심리. 이런 작은 연출 하나하나에서 작품의 주제를 살리려고 한 노력이 인상 깊었다.
또한 성우 하야미 사오리의 열연으로 니시미야가 감정을 드러내는 씬들은 정말 가슴을 울렸다. 이미 알고 있는 내용임에도 어찌 울컥하던지. 그런 장면들마다 영화관은 훌쩍임으로 가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아쉬움이 남을 수밖에 없는 작품이 되고 말았다. 바로 분량 때문이다.
애니메이션 <목소리의 형태>는 캐릭터의 마음이 크게 드러나지 않는다. 원작을 중요시 했기 때문일까, 7권이나 되는 원작의 흐름을 2시간으로 압축하기 위해 사건 위주로 담아내었다. 그래서 캐릭터들의 마음을 대변하는 시간이 너무나도 부족했다.
이로 인해 애니메이션의 쇼야는 평범한 주인공이 되어버렸다. 애니메이션에서는 쇼야의 막대한 죄책감과, 왕따 경험에서 비롯된 비굴함 등은 보기 힘들어졌다. 그렇기 때문에 주인공을 이해하는 것은 더더욱 힘들어지고, 결국 캐릭터 내면에 대한 깊은 이해보다는 장면 장면의 힘으로 관객을 끌고 나갈 수밖에 없어진다. 그 부분이 애니메이션 <목소리의 형태>가 원작에게 뒤쳐지는 가장 큰 단점이다.
게다가 시마다나 마시바 같은 조연들의 이야기도 제대로 담지 못했다. 작중에서 이 둘과 관련된 중요 장면들이 나옴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조명하지 않아서 원작을 읽지 않은 관객들은 다소 의아함을 느꼈을 것이다. 특히나 마시바는 '왕따' 문제가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하는 니시미야와 대척점을 이루는 캐릭터인데 이 캐릭터 묘사가 아예 안 되어서 작품의 매력이 반감했다는 점도.
극 후반부, 쇼야에게 결정적인 사건이 일어난 이후의 전개는 더더욱 숨가쁘다. 시점이 니시미야에게로 옮겨진 이후 결말에 이르기까지 조연들의 심경 변화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전혀 조명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엔딩 씬들이 붕뜬다는 느낌을 받기 쉽다. 특히나 이 부분은 주인공 쇼야가 진정한 의미로 '소통'을 시작한다는 의미와 다른 조연들 역시 한 발씩 성장한다는 의미를 담은 씬이기 때문에 이 성장에서 카타르시스를 느끼기 위해선 캐릭터들의 심경 변화가 매우 중요했다.
차라리 극중 사건을 극장판 애니메이션에 맞게 새로 짜거나, 그게 힘들다면 2부작이었으면 더 좋은 작품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진하게 남는다. 특히나 이런 작품은 '사건'보다도 캐릭터들의 '심리'가 중요한 작품이라 이 부분을 매끄럽게 표현하지 못했다는 점이 너무 아쉽다.
이런 아쉬움이 남지만 그래도 나는 이 작품에는 중요한 의의가 있다고 생각한다. 작품의 소재의 일부인 '이지메'의 경우 한국이나 일본이나 굉장히 민감한 소재다. 가뜩이나 잘못하면 미화라는 비판을 받기도 쉬울뿐더러, 보는 사람도 불편해지는 소재라 굉장히 피하기 쉬운 부분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피하지 않았다.
작품은 처음부터 끝까지 불편하다. 단 한순간도 편하다고 느낀 적이 없다. 원작보다는 수위가 약간 내려가긴 했지만, 그런데도 러닝 타임 내내 불편했다. 이 작품은 그것만으로도 그 존재 의의를 가진다. 관객을 불편하게 만드는 것.
학교에는 세 부류의 학생이 존재한다. 왕따 피해자, 왕따 가해자, 그리고 방관자. 아마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은 방관자 사이드에 서있었을 것이고, 그 사람들조차 이 작품을 보면서 많은 불편함을 느꼈을 것이다. 쇼야의 죄책감을 공유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분명 아쉬움이 많이 남는 작품이다. 한계 또한 분명하다. 그러나 그럼에도 소통의 의미를 곱씹는 기회와, 가볍게 넘어가기 쉬운 불편함을 눈앞에 들이민다는 점에서는 다른 작품은 전하지 않았던 무언가를 전해주는 작품이다.
'단평 > 영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타마코 러브 스토리 - 블링 블링 힐링 왕도 로맨스 (0) | 2022.04.09 |
---|---|
마음이 외치고 싶어해 - 마음 한 켠을 따뜻하게 만들어주는 이야기 (0) | 2022.04.09 |
너의 이름은 - 신카이 마코토의 놀라운 변화 (0) | 2022.04.09 |
귀멸의 칼날: 무한 열차편 - 원작을 한없이 초월한, 원작에 가로막힌. (0) | 2022.04.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