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반쪽 날개의 종이학과 허세부리는 니체
책의 첫인상을 결정하는 요소는 무엇일까?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보통 제목과 표지, 그리고 뒷면에 나오는 광고 문구를 꼽으시는 분들이 대다수일 것이다. 그 외의 요소로 작가 이름이나 출판사 정도가 있겠다. 내가 이 책의 첫인상을 매력적이게 느끼고 구입하게 이르게 된 요소는 이 중 세 가지였다. 첫째 제목, 둘째 표지, 셋째 레이블이다. 일본의 미디어 웍스 문고와 비슷한 지향점을 놓고 있는 노블 엔진 팝은 내가 좋아하는 레이블 중 하나고 10명 중 9명 이상은 감탄할 것 같은 매력적인 표지. 그리고 쓸데없이 길지 않고 문장형도 아닌 간결하고 의미심장한 제목. 이 책의 첫인상은 10점 만점에 9점은 줄 수 있는 작품이었다.
처음 책을 펼치고 프롤로그를 다 읽었을 즈음 느꼈던 점은, 아 이거 사람들 평가가 안 좋을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었다. 작품이 굉장히 감성적인 데다가 주인공과 히로인이 중학생, 즉 사춘기를 겪고 있는 캐릭터기 때문에 사람에 따라 찌질하다거나 나아가서 중2병 같다는 평가를 받기 쉬운 작품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이 발간된 2015년은 감성적이다는 말을 오그라든다고 표현하는 경우가 잦은데다 사춘기의 성장통은 찌질함의 대명사고, 감정을 죽이는 것이 쿨하고 멋진 것으로 표현되는 시대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다.
하지만 괜히 치장에 공들이지 않고 있는 그대로 표현한 것이 이 작품의 매력 중 하나였다고 생각한다. 대중이 요구하는 '쿨'과는 거리가 멀지만 있는 그대로 표현했기 때문에 성장통을 겪고 있고, 혹은 겪어본 사람들의 공감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 점이 정말 좋았다. 사춘기 시절의 명암을 모두 겪어봤기 때문에 더더욱 공감 가고 사랑스러운 이야기가 아니었나 싶다.
소설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르를 꼽으라면 역시 '성장 소설'인데, 이 작품 역시 그 카테고리에 들어가는 작품이다. 사실 한국에서 발간된 라이트노벨을 모두 읽어보진 않았지만 유명한 것은 몇 개 읽어봤지만 '성장 소설'에 들어갈만한 작품은 거의 없었다. 있더라도 '성장'이 메인 테마는 아니었다. 그런 면에서는 이 작품은 내게 정말 뜻깊은 작품이다. 내가 읽어본 한국산 라이트 노벨 중 최초로 성장이 전면으로 나온 성장 소설이었기 때문. 이야기 자체는 굉장히 평범하다. '자살', '왕따', '삶의 의미'를 소재로 사용한 성장 소설이라면 취할법한 왕도적인 전개를 보이고 있는 작품이다. 프롤로그를 읽자마자 결말이 머릿속에 그려지는 사람들 많았을 거다. 하지만 작품의 매력이라는 게 이야기에서만 오는 게 아니다. 만약 그랬다면, 소설가들은 늘 새로운 이야기만 써내야 할 거고 시중의 대다수의 작품은 묻혀버리고 말았겠지.
이 작품의 매력은 바로 현장감이다. 그동안 '한국적 라이트노벨'을 위해 정말 다양한 작품이 많이 나왔지만, 정작 뚜껑 까고 보면 한국 이름을 쓴 캐릭터가 한국적인 소재를 갖고 노는 일본식 라이트노벨인 경우가 많았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은 한국적 라이트 노벨이라고 불러도 될 것이다. 작품에 등장하는 캐릭터나 배경이 굉장히 디테일하다. 정말 있었던 일을 묘사한 것 같은 현장감이 이 작품 최대의 강점이다. 특히 교실을 배경으로 하는 장면은 정말 현장감이 넘치는데 이건 직접 읽어보지 않으면 말로 설명하기 힘들 것 같다. 대한민국의 평범한(?) 중, 고등학교를 졸업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고개를 끄덕끄덕할만한 압도적인 현장감이었다.
그리고 이 현장감을 뒷받침해주는 것이 바로 작가의 문장력이다. 묘사가 굉장히 간결하고 정확하다. 군더더기가 없기 때문에 글이 지치지 않고 정확하기 때문에 작품의 배경이 살아난다. 모에 코드나 유행하는 코드로 점철되기 십상인 라이트 노벨 문장에서 이렇게 간결하고 아름다운 문장은 그야말로 축복이라고 볼 수 있다. 책에 몰입감을 높여주는 일등공신이 아니었나 싶다.
캐릭터도 굉장히 현실성 있고 매력적이어서 좋았다. 가장 감탄했던 건 역시 주인공의 조형인데, 주인공이 찌질하다고 받아들이는 사람도 굉장히 많겠지만 사실 이 캐릭터의 조형은 사춘기 남성의 본성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독자가 남성이라면 본인이 중, 고등학교 시절의 사고 패턴을 곰곰이 떠올리면 알 것이다. 이런 생각 한 적 없다고 부정할 사람 아무도 없을 거라 믿는다. 행동으로 취하지 않을 뿐. 다만 그 변태력은 평범함보다는 조금 더 비범한 것 같긴 하지만…. 반대로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은 주인공의 첫사랑으로 나오는 '강다혜'. 현실에서 보기 드문, 아니 없다고 봐도 좋을 만큼 희소한 대천사급 캐릭터라 오히려 이 작품에서 가장 이질적이지 않았나 싶다.
작품의 플롯은 위에서도 언급했다시피 평범했던 작품이지만, 상징성만큼은 매력적이었다. 특히 '종이접기'로 대변되는 주인공과 '니체'로 대변되는 히로인은 정말 멋진 조형이었다. '종이접기' 코드에서 엿보이는 어린 시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반쪽짜리 주인공과 '니체' 코드에서 엿보이는 너무 성숙해지려고 노력했던 반쪽짜리 히로인이 만나서 이뤄지는 폭발적인 시너지는 이 작품의 백미 그 자체. 제목인 반쪽 날개의 종이학과 허세 부리는 니체는 그야말로 이 작품을 대변할 수 있는 가장 정확한 말이 아닐까 싶다.
전체적으로 수준 있는, 굉장히 좋은 작품이었다. 왕도적이고 깔끔한 구성, 간결하고 명확한 묘사, 현장감 넘치는 배경과 캐릭터 등 흠잡기가 어려운 멋진 소설이다. 딱 하나 걸리는 거라면, 독자의 경험에 의존하는 경향이 강할 듯하다는 점 정도. 독자의 학창 시절 경험에 따라 공감 여부가 갈라져서 호불호가 강해질 수 있겠다. 비익조형 캐릭터, 즉 혼자서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둘이서라면 험한 세상을 헤쳐 나갈 수 있는 이런 캐릭터 조형을 굉장히 좋아하기 때문에 더더욱 사랑스러운 작품으로 기억되지 않을까 한다. 작가의 다음 작품이 기대된다.
그러니까 하나 더 해줘.
뭘……, 더 하면 되는데?
종이접기, 가르쳐 줘.
네가 싫어했던 너도, 네가 좋아했던 너도, 모두 내가 좋아해 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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