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Re : 제로부터 시작하는 이세계 생활 (Re:ゼロから始める異世界生活)
사실 이세계물을 썩 좋아하지 않는 편이기 때문에 사놓고도 정말 손이 안 갔던 책인데 <재와 환상의 그림갈>로 어느 정도 편견을 좀 떨어뜨려놓고 보니까 정말 훌륭한 작품이었다. 선입견의 안 좋은 점을 또다시 깨닫게 해주는 작품이 되었다. 물론 이런 선입견이 좋은 방향으로 작용할 때도 있지만, 작품이라는 건 역시 봐야 아는 것이다.
사실 이세계물의 특징이라면 뭔가 특별한 능력을 안고 전이 혹은 환생하거나 현대인 천재론 같은 웃기지도 않는 짓을 배경으로 하는 작품이 많다. 그런 특징들이 너무 싫어서 이세계물을 꺼렸던 것도 있고. 이 작품의 경우 주인공이 갖고 있는 것은 편의점 봉투와 컵라면, 스마트폰 정도뿐이다. 물론 스마트폰이 배터리 무한이라던가 인터넷 가능이라던가 그런 옵션 없이 평범한 스마트폰. 거기다 능력이라면 능력인데, 주인공은 죽어도 어느 분기점으로부터 리스타트가 가능하다. 그 분기점은 스스로 정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특정한 사건으로 정해지는 것. 여하튼 커다란 능력이지만, 막상 문제 해결에는 적극적으로 도움이 되는 부류의 능력은 아니다.
이 작품은 그런 능력에서 비롯된 이야기다. 작중 주인공은 몇 번이나 사건을 만나고 그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수없이 죽음을 반복한다. 그의 행동원리는 단 하나, 이세계에 처음 온 자신을 구해준 소녀에 대한 은혜 갚기 뿐. 알지도 못하는데다 수상하기 짝이 없는 자신을 조건 없이 구해준 그녀를 돕기 위해 그는 수없이 죽음을 반복하고 사건을 되풀이하면서 그녀를 돕는다. 캐치프레이즈는 <비록 네가 잊었더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아>.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희생을 반복하면서 한 소녀를 구하려고 하는 작은 영웅의 이야기. 정말이지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는 작품이다.
여타 작품과는 다르게 주인공은 분명히 '히어로'지만 별다른 힘은 없다. 할 수 있는 거라면 꺾이지 않는 것, 그리고 마음이 꺾이지 않으면 무한한 기회가 주어진다는 점이다. 이는 치팅이라고 비판할 수도 있겠지만, 작중 내용을 읽는다면 그런 느낌을 전혀 주진 않는다. 주인공은 정말이지 철저하게 구른다. 몇 번이나 마음이 꺾일만한 상황에 놓이고, 그때마다 마음이 꺾이기도 한다. 하지만 누군가의 손길로, 자신을 향한 채찍질로 다시 일어서고 마는 주인공을 보고 있노라면 절로 응원하지 않을 수가 없는 그런 이야기다.
이 작품의 진가는 3장 마지막에 드러나는데, 개인적으로 3장 클라이맥스는 최고였다. 읽고 나면 렘을 사랑하지가 않을 수가 없는 작품. 그야말로 이 작품의 존재 이유 그 자체다. 아주 긴 시간 동안 방황과, 절망과, 잔혹함을 넘어서서 심신이 피폐해지고 꺾여버린 주인공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그 장면은 눈물 없인 볼 수 없는 최고의 이야기. 3장 초, 중반이 상당히 읽기 버겁다는 점은 단점이지만 그 단점마저 모두 잊게 만드는 최고의 장면이다.
적어도 그 장면을 위해서라도 이 작품을 보는 것을 권하고 싶을 정도로 인상적인 작품이다. 작품의 내용에 정말 혐오할 정도로 싫어하는 부분이 없다면, 꼭 한 번쯤은 읽기를 권하고 싶은 작품이다. 몇 번의 위기를 맞이하고, 설령 쓰러지더라도 마지막엔 반드시 일어나는 작은 영웅의 이야기. 강하진 않더라도, 결코 꺾이지는 않는 남자의 이야기. 그런 이야기는 언제나 매력적인 법이다.
"스바루 군이 거짓말하고 있는 것쯤, 렘은 알아요.
내내 계속, 스바루 군을 보고 있는 걸요."
쑥스럽게 배시시 웃은 렘은 장난기 어린 몸짓으로 입가에 손가락을 대었다.
그리고 그 손가락을 스바루 쪽에 겨누고 말을 이었다.
"그 거짓말의 이유를 설명하지 못하는 것도 알아요.
하지만 딱히 그걸 설명해주지 않는다고,
렘에게 마음을 쓸 필요는 없거든요?"
"─────"
"왜냐면, 렘은 스바루 군을 통째로 믿고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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